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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최순실, 200억, 2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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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구역을 나와서 인적이 드물고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를 10분쯤 걸어가면 대구무역회관이 나온다. 그곳 1,3층에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 라는 곳이 있다. 최신축 건물의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PC들과 세미나룸이 있는데 항상 한가하고 반쯤 비어있었다.

이런 위치에 이런걸 운영해서 수익이 나올리 없어 보인다. 결국 공공재로서 임대료, 인건비 등 운영비는 계속 들어갈 것 같은데, 쓰는 사람조차 드무니 어떤 효익이 있는지 모르겠다. 무역협회가 ‘인적이 드문 대로변’에 건물을 크게 지어놨는데, 몇년간 임대가 안돼서 골머리를 앓던 1,3층에 들어온 단비와 같은 ‘호갱’ 임차인이다.

 

이런 식의 정체가 불분명한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전국 18곳에 들어섰다. 창조경제라, 문화융성스러운 단어의 조합이다. 뭔가 있어보이려 애썼지만 알맹이는 없는 조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일에 기업들의 돈을 내게 했는데, 대구센터의 돈은 삼성이 댔다. 미르재단이 거둔 것과 같은 준조세가 여기에도 있다.

기업은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김대중-이명박 정부 시절 정도만 해줘도 기업은 알아서 달릴만 하다. 예측불가능한 이상한 규제와 아젠다를 내놓는, 예컨데 박근혜 정부같은 존재가 기업에겐 리스크다. 삼성전자,현대차 같은 한국의 간판 수출기업들은 세계시장에서 생존을 걸고 경쟁하고 있다. 여기서 탈락해 노키아꼴 나면 한국도 핀란드꼴 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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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뉴스타파 – “최순실의 배후세력”

 

이러한 기업들이 가장 바라는 정부? 발목잡지 않는 정부다. 지금같은 시대에 정부가 기업에게 줄 수 있는 특혜나 도움은 미미하다. 기업은 1류지만 정부는 3류이다. 3류가 1류에게 훈수를 두거나 도움을 주는게 가당키나 한가. 오히려 정부가 기업에 빨대를 꽂고 있는 꼴인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빨대까지도 좋은데, 발목만 잡지 말라는 거다.

오늘 웬 덜떨어진 선동을 봤다. 삼성이 200억원을 미르재단에 출연했는데, 영업이익이 26조원이라는 이야기다. 어이가 없다. 삼성이 미르재단에 200억을 강탈당한 것과 삼성전자가 세계시장에서 열심히 뛰어 만들어 낸 영업이익 26조원(그나마 올해 노트7 사태로 일부는 줄어들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선동의 당사자는 아마도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청탁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엮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르재단에 뜯긴 200억과 세계에서 벌어들인 26조원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도움은 커녕 위협만 되는 존재에게 그냥 ‘옛다 먹고 떨어져라’ 한거다.

게다가 삼성가와 연결된 JTBC와 중앙일보가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날린 결정타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범삼성가의 언론이 박근혜 정부의 심장을 정조준했다. 그리고 비선실세 의혹을 최조 제기했던 조선일보와 관련보도를 신나게 쏟아내고 있는 TV조선의 공은 왜 찬양 안하나. 적어도 기준의 일관성은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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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례행사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민중총궐기를 외치며 정부 보조금 타내서 부정사용하고, 입만 시끄럽게 박근혜정부 퇴진이니 온갖 이슈를 섞어 연대한답시고 아웃소싱 시위를 하며, 좌파인물들이 운영하는 이벤트 회사 매출을 올려주고, 전문시위꾼 인건비 타먹기를 위해 떠드는 각종 좌파시민단체들보다 삼성이 더 민주투사로 최전선에서 제대로 된 일을 수행한 거 아닌가?

법인세율? 박근혜 정부는 단 한번도 법인세율을 내려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준조세스러운 이상한 삥뜯기나 계속 해갔을 뿐이다. 정부에게 가장 만만한게 기업 아니었나. 성과연봉제? 그거 공공기관 대상이다. 대체 이게 민간기업에 무슨 임팩트가 있었나. 쉬운 해고? 그래서 사람이 실제로 무더기로 짤려나가 기업이 인건비 좀 아껴 이득 본게 있나?

 

실제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고, 이 나라가 움직일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내는 것은 기업이다. 정치인이니 시민단체니 뭐니 다 거기에 숟가락 얹어 입으로 먹고 사는 존재들일 뿐이다. 세금 귀한 줄 알아라. 세종시, 혁신도시 같은 뻘짓에 수백조원을 날려드신 모씨에 비해서 낭비의 스케일이 티끌 수준에 불과하지만, 창조경제, 문화융성, 정체모른 재단에 천억단위 날려드시는 것도 분명히 문제다. 세금은 그들의 쌈짓돈이 아니다.

박근혜야 하야를 하시든지 1년간 버티기 모드로 들어가시든지 알바 아닌데, 당장 삼성전자의 갤럭시 S8과 현대차의 신형 그랜저가 성공하는 것은 바로 해당 기업 근로자, 협력업체 직원들, 주주들, 그리고 거기에 빨대꽂아 먹고사는 정치인, 관료, 공공기관, 은행들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의 밥그릇과 생존이 걸린 문제다.

“오옷. 최순실. 미르. 출연. 200억. 26조. 때는 이때다!” 라고 기업을 엮어 만든 선동자료로 엉뚱한 기업 그만 괴롭혀라. 그대들 없어도 기업과 사회는 아무 문제 없지만, 기업 없으면 숙주가 사라진 바이러스가 되어버린 정치인, 시민단체는 어떻게 먹고 살것인가. ‘음수사원’ 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먹는 물을 누가 떠다주는지 생각들 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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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한 우파이고 싶다

 

청년 우파의 정체성

현재 한국사회 우파 청년들은 ‘광우병 사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감성으로 포장했던 ‘선동’의 허무함과 위험성은, 많은 청년들을 우파 진영으로 이끌었다. 감정적이고 자극적인 인터넷 민심 속에서 스스로를 우파로 규정해온 일이, 누군가에겐 우습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우파 청년들은 ‘원칙’과 ‘진실’이 대한민국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고 믿었기에 비웃음을 감내했을 것이다.

‘청년 우파’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적이 없고, 민주화와도 별 상관이 없다. 솔직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세대 아닌가. 그저 산업화와 민주화의 로망에 의존하는 윗 세대의 리더십 중, 무엇이 우리의 미래에 더 나은 선택인지를 계산해왔을 뿐이다. 그리고 지난주까지만 해도, 나를 포함한 ‘우리’는 민주화의 그림자에 가려진 국가 안보의 훼손과, 노동 시장 개혁의 지체와, 시장 자유주의의 퇴보를 걱정했다. ‘공정한 경쟁’을 원했고, ‘지켜져야 할 원칙’을 믿었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고 믿는 가치에 대한 떳떳함이 있었다.

 

【서울=뉴시스】전진환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순실에 대한 연설문 유출 의혹과 관련해 입장 발표를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있다. 2016.10.25. amin2@newsis.com

 

최소한의 명분마저 잃어버린 우파 진영의 현재

그러나 떳떳함의 뿌리가 이렇게 한 순간에 뽑혀나갈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최순실 이전에 정윤회가 있었다. 처음 십상시와 비선 실세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주장 자체가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 정도로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던 ‘의혹’들이 하나 둘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심지어 초기 의혹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 민주주의’라는 ‘대원칙’을 깼고, 대한민국을 ‘봉건 국가’로 퇴보시켰음을 사과를 통해 인정했다. 그런데도 여당은 조용하다.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인물인 우병우 수석은 침묵하고 있다. 최순실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주요 정치인들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심지어 우파라고 자칭하던 이들은 태블릿 PC의 취득 경로가 의심스럽다며, 단순 ‘첨삭’만 받은 것이 무엇이 문제냐며, 이 정도의 비리는 어느 정권에서도 있었다는 말까지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내뱉고 있다.

나는 떳떳하고 싶다. 대통령도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상황에서 ‘광우병 사건’에서 지켜봤던 비 원칙, 진실 외면과 모순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 앞세웠던 원칙과, 질서와, 국가 안보, 그 이전에 윗 세대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자유 민주주의’가 그저 ‘진영’의 잘못을 덮고 승리를 도모하는 ‘정치 공학’의 연장이었다면, 나는 스스로를 우파라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빨갱이보다는 박근혜”라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래도’라는 최소한의 명분마저 스스로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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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원칙’을 되찾기 위하여

베이비부머 세대인 내 부모님께선 지난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시며, “그래도 박근혜 대통령이 형제들한테 하는 것을 보아라, 원칙에 대해서는 칼같이 지켜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께서는 지금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 하고 계신다. 나는 ‘아스팔트’라고 불리며 비웃음 당하던 어르신들 중 많은 분들이 지금 이 순간 가장 괴롭고 부끄러움에 몸서리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믿음과 신뢰의 뿌리에 ‘원칙’이 있었다면 말이다. 지금 이 순간, 정치공학을 따져가며 시간을 끄는 것이 답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이것 하나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당신들은 절대로 ‘원칙’을 중시하는 ‘우파’가 아님을.

대학들에서 시국 선언이 쏟아져 나온다. 익숙한 풍경이 반복된다. 2016년의 대학교 학생회들이 ‘시국’을 걱정하며 내세우고 있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공감이 잘 가지 않는다. 나는 산업화가 이끌어온 국가의 발전을 직접 보지 못 했고, 민주화가 이미 이루어진 시대에 태어났다. 그저 ‘원칙’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파라고 해서 수위 높은 발언을 자제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조용히 현실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파’라면 더더욱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의 주변에서 우파의 이름 하에 사리사욕을 채운 자들에게 죗값을 확실히 물어야 한다.

‘원칙’과 ‘진실’을 외면한 ‘봉건 정권’의 과오를 정리하지 않고 돌아오는 대선을 이겨봤자, 그것은 또 다른 ‘봉건 정권’의 연장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설령 대선에서 우파진영이 패배한다 하여도, ‘진실’을 마주하고 ‘원칙’을 지키며 얻은 패배가 다시 찾아올 ‘떳떳한 승리’의 밑거름이 될 ‘값진 패배’라고 믿는다. “원칙을 어긴 지도자는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선례를 남기는 것이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유산이라고 믿는다. ‘우파’라면 말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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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가짜 박사’ 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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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전체주의’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는 돈 말고는 다른 가치가 맥을 추지 못하는 사회다. 사회는 시장을 포함하는, 시장보다 훨씬 큰 실체인데 사회를 마치 시장을 경영하듯 해왔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어떻게 탈피할지 지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경비 절감을 목표로 하는 경영합리화, 비정규직 양산을 통한 경비 절감 등 돈을 인간보다 우선시하는 시장전체주의적 발상을 걷어치우고, 일자리 안정과 기본소득을 보장해 국민들을 생존의 공포로부터 건져내야 한다.” 이 사람의 ‘저서’는 대개 18,000원을 웃돈다. 교양서 치고는, 그리고 시장의 부정적인 면모만 강조하는 내용이 담긴 책 치고는,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은 일명 ‘세월호 교수’로도 이름이 나 있다. 그의 이름과 세월호를 함께 검색어에 치면 나오는 기사만 30건이다. 시국 선언이니, 세월호 토크콘서트니, 세월호 대담 인터뷰니 하는 것들이 그의 최근 2년 간의 주된 활동 기록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를 지칭해 ‘이 무능하고 오만하며 반성 없는 권력에 끊임없이 맞서겠다.’고 공공연히 엄포를 놓은 적도 있다. ‘정의’와 ‘도덕’ 그리고 ‘가치’라는 단어는 인터뷰나 칼럼에 세 문장 마다 한 번씩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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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경희대학교 영어학과 교수로 30년을 재직하고 동대학 후마니타스 칼리지 대학장을 역임한 도정일이다. 도교수는 우리 사회에 이슈가 터질 때마다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등이 달려가 조언을 구하는 좌익학계의 원로다. 대중들에게는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인문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교수가 경희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하와이 대학 박사학위 경력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학위가 거짓 학위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학위가 논란이 되자 그는 슬그머니 ‘하와이 대학 박사과정 수료’ 라고 네이버 프로필을 수정했다. 그러나 1983년 경희대에 임용된 이후 그는 줄곧 ‘하와이대 영문학 박사’를 대표 이력으로 내걸어왔다. 미국의 학위 확인 기관인 NSC(National Student Clearinghouse)에 따르면, 도 교수는 1975년 9월부터 1985년12월까지 하와이대에 적을 두기는 했다. 그러나 10년의 기간 동안 그는 석사와 박사 중 아무 학위도 받지 못했다. 경희대에 임용된 1983년 3월 이후 2년 9개월 간, 박사논문을 쓰기 시작한 1981년 이후 4년 이상의 기간 동안 학위를 취득하지 못한 채 졸업연한을 채운 것이다.

 

일반인들이 바쁜 시간을 쪼개 간이로 취득한 학위와 학문을 업으로 삼은 ‘교수’의 학위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교수의 학위는 교수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기본 전제이기 때문이다. 논란이 일자 경희대학교는 ‘그 시기에는 관행 상 석박사학위가 없어도 교수 임용이 가능했다’ 고 해명했다. 궁색하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설령 대학의 해명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도교수가 한국사회에서 얻은 명예, 위치, 신분 등에 그의 ’가짜 박사학위’가 기여한 부분은 절대 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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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이럴 수는 없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의의 한 부분이 무너지고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의를 앞장서서 외쳐온 도교수 때문에. 학위를 속이고, 세월호의 이름으로 책을 팔고, 강연료를 받으면서 사는 사람. 이것이 가짜 박사학위 뒤에 숨겨진 도교수의 민낯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한국형 변종 좌익의 전형적 특성이기도 하다.

 

좌·우파는 단순히 정치·이념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태도에서 나뉜다. 겉으로 ‘정의’와 ‘가치’와 ‘인간성의 회복’ 같은 아름다운 문장들을 부르짖지만, 그 뒤로는 정반대의 속성을 가진 이들. 이것이 우리나라 좌익들이 득세하고 있는 소위 ‘지식인 사회’다. 게다가 사회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가짜 박사’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방향을 묻는 경향 한겨레 등의 언론들은 대체 뭐하는 곳이란 말인가.

 

필자와 같은 청년들은 우리 사회에서 또 한사람의 존경할 만한 지식인을 잃었다. 정의와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던 어른은, 알고 보니 뻔뻔한 거짓말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던 사람이었다. 앞으로 우리는 누구에게서 지혜를 얻고 삶의 자세에 대한 조언을 구할 것인가. 그렇게 당하고도 또 정의와 올바름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아가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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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성공하는 사회는 없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위인전을 읽고 성공신화를 접해온다. 그 결과 자수성가를 미덕이라 생각한다. 자수성가란 무엇인가.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자면,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집안을 일으킨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수성가 스토리는 대체로 그 개인이 노력하여 일군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알게 모르게 주어진 기득권에 대해서는 보통 언급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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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과학혁명의 시초가 된 뉴턴은 현대 과학의 상당한 부분의 기초를 만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연구업적은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수준이니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 17세기 우리 선조들이나 여타 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는 왜 뉴턴과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았냐고 말하면 곤란하다. 풀뿌리 하나 주워 먹기 힘들고, 캠브리지 대학의 연구시설은 커녕 서당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던 당시 조선을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뉴턴이란 입지전적인 인물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영국이라는 비교적 인프라가 잘 갖추어진 나라에서 태어났고, 당시 대학에 진학할 만큼 부유한 집안이었다는 ‘기득권’이 있다. 현대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도래도래 과자점의 성공신화가 널리 퍼진 적이 있었다. 젊은 여성 CEO가 소자본으로 시작하여 꾸준히 한 가지 업종에 집중하다 보니 성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헌데 얼마 후 그 사장님의 아버지가 인천 구월동의 14층의 오피스텔 건물주였고, 그러한 성공신화도 어느 정도 배경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그러고 보니 21살의 나이에 주식처분금과 세뱃돈으로 마련했다는 8천만 원의 창업자금도, 임대차 계약을 5년 이상 갱신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그러한 배경에서 사업을 한다한들 도래도래 사장님처럼 크게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그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보통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어떠한 기득권이 있다. 그러니 이러한 성공신화는 자영업을 시작하는 분들 중 꼭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줘야지, 다수의 청년들에게 강요하기 시작하면 결국 너희들은 노오력이 부족한 사람들이란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 것이다.

 

기득권은 그렇다. 정작 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권리가 무엇인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나 공기업, 금융권 등의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 분들은 은행에서 직장을 담보로 신용대출을 받은 수 있다.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다시 갚아야 하는 빚인데 이게 무슨 혜택이냐 하시는 분들도 계실테지만, 자영업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나 학생들에게는 그것도 큰 혜택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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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은 그래도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분들일 것이다. 당신이 서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남미 어딘가 부족에서 태어났다면 사교육은커녕 공교육도 받지 못해 문맹이 될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더운 오늘 아침 교통체증 및 만원 지하철로 짜증이 났을 수 있지만, 지금도 지구 반대편에서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서 먼지 폴폴 내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지하철은 커녕 기초적인 공공교통시스템조차 미비한 도시들도 상당하다. 그러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정말 노력해서 무언갈 얻을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 인생은 운칠기삼이다. 우리나라가 그러한 환경에 있었을 때가 고작 오십 년 전이었고, 세계적으로 드문 케이스로 경제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세대는 그때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십 년 전 우리와 경제 수준이 유사했던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위인전이 필요한 경우도 존재한다. 나의 경우 중동에서 건설공사 현장에 갑자기 덩그러니 놓여지고 인도 아저씨들 백여 명의 리더가 되어 땅을 파고 공구리를 치러 다닌 적이 있었다. 살면서 리더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던 나는 리더십에 대한 책이 절실했다. 그러나 중동에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으며, 궁여지책으로 찾아본 위인전이 딴지일보에서 연재 중이었던 ‘테무진 to the 칸’ 이었다. 당시 칭기즈칸 이야기는 나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자무카라는 더 재능 있는 경쟁자가 있었음에도 신뢰와 관용으로 칸의 자리에 오른 칭기즈칸이 나의 유일한 ‘리더십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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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자서전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의 공식 자서전을 보면 그의 성공스토리는 물론 그가 인생을 살아오며 끼쳤던 해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일을 하며 폭언을 하는 건 예삿일이고, 심지어 동거했던 여자 친구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외면했던 흑역사까지 서술된다. 비록 잡스는 어린 시절 친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지만, 양부모 밑에서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다는 점도 언급된다.

 

내가 자서전 중에서 잡스의 책을 최고로 꼽는 이유는 이런 이유에서이다. 잡스는 자신이 가진 기득권과 노력, 장점과 단점을 모두 나열하고, 철저히 제3자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을 기술하길 원했다. 나는 잡스가 매킨토시나 아이폰을 만들어서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하지만, 세상에 훌륭한 자서전을 남기고 간 점이 더 위대하고 생각한다.

 

글을 맺어보자. 우리는 각자 알게 모르게 주어진 기득권이란 게 있다. 노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각자 처해진 상황에 따라 꿈을 이루는 방식도 제각각일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성공방식을 남에게 강요하고, 내가 이렇게 자수성가했으니 너희도 꿈을 꾸고 노력한다면 이룰 수 있다는 식으로 설파하기 시작하면 곤란하다. 성공이란 것이 이젠 그렇게 중요한 담론도 아니다 싶지만, 그 성공을 이룬 자신의 스토리도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인지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정치인이 되어 나와 같이 가진 것이 없어도 누구나 꿈을 꾸고 노력한다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어설픈 포부는 접을 수 있지 않을까.

 

부자아빠 로버트 기요사키의 책을 보면 현금흐름 사분면이 나온다. 보통 사람들같이 월급 받고 직장 생활하며 근로-노동 수입을 받지 말고, 현금흐름을 창출할 수 있는 자산, 인세, 권리 수입을 받는 쪽으로 사분면을 이동하라는 말이다. 적어도 그는 책을 팔아 인세를 받고, 그 인세를 바탕으로 자산을 굴리고, 굴린 자산의 권리로 수입을 창출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런 생활을 한다면 그러한 삶도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베스트셀러를 팔고, 건물을 살 수는 없다. 재화는 유한하고, 그 재화를 소유할 수 있는 사람도 한정적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이와 같은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 누구나 성공하는 사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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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이 허락하신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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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의 저자인 문유석 판사(페이스북)의 칼럼이 중앙일보에 올라왔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인터넷에 분노한 남성들이 많다.
2. 하지만 여성들의 분노가 더욱 크고 정당하다.
3. 남성들이 너무 둔감한 게 아니냐.
4. 좀 더 큰 그림을 ‘돌아보라’

해당 칼럼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중앙일보의 댓글란에 달린 글의 논지를 비판하는 댓글들에는 압도적인 ‘비추천’이 달렸다.

문유석 판사는 글에서 ‘남성들’이라고 뭉뚱그려 놓았지만, 실제로 ‘역차별’을 체감하는 남성 중 절대다수는 ‘젊은 남성’이다. 그리고 ‘나이든 남성’과 ‘젊은 남성’을 분리하는 시각에서 문유석 판사의 글을 보면,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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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 1

“여성들은 능력에 맞는 기회와 임금을 달라,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직업상 불이익을 주지 말라, 때리지 말라, 용변 보는 걸 몰카로 찍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며 분노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여자는 군대 안 가냐, 더치 페이 왜 안 하냐, 왜 농담에 예민하게 구느냐, 난 안 그러는데 왜 싸잡아 욕하느냐로 분노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누군가 말했던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 예가 아닐까.”

문유석 판사의 한마디.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문맥을 감안한다면, 해일은 여성들이 받고 있는 ‘중대한 차별’이고 조개는 남성들이 받는 ‘사소한 역차별’이 된다. 이제부터 문유석 판사가 꼽은 해일과 조개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법조계에 대한 얘기를 했다. 여성 부장 판사가 언제 탄생했고, 전체 법관 중 여성은 ‘아직’ 28%에 불과하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직’이다.

문유석 판사는 ‘분노한 남성’들로 뭉뚱그려서 표현했지만, 역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남자들은 보통 ‘젊은 남자’다. 여기서 현재 로스쿨 합격생의 남녀 비율을 보도록 하자. 2014년 기준으로 남성은 56.3%, 여성은 43.7%이다.

아직 12%나 차이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로스쿨 정원에서 대표적인 남초과인 법학/상경/공학 비율이 과반을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리고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이화여대 로스쿨을 생각하면 불평등이 ‘실제로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설령 모종의 차별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젊은 남성들의 책임은 아니다. 젊은 남성이 뽑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유석 판사가 말했듯 법관 중 여성 비율은 ‘아직’ 28%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미 나이든 남자들이 법조계에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법관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들어왔던 수많은 ‘나이든 남성’들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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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법시험 합격자의 평균연령 상승(김두얼, 2010)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 2

아래는 문유석 판사의 글에 나오는 부분이다. 여기서도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은 군대,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을 이야기한다. 맞다. 차별이다. 그런데 그 차별조차 여성들이 만든 게 아니다.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에 스스로 만든 차별이고, 시대 변화에 따라 자연 소멸할 운명이다.”

문유석 판사는 차별을 만든 이들이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의 남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문유석 판사는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의 남성’이다.

20년 전에 태어난 남성과 지금 태어난 남성 중 누가 경쟁상대가 적은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시절에는 남자만 경쟁하면 됐다.

문유석 판사가 법조계를 예로 들었으니, 법조계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사법시험 여성합격자 비율을 보자. 사법시험 여성합격자 비율은 2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겨우 20%를 넘긴다. 그 전에는 처참한 수준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더니, 2000년대 후반부터는 40% 언저리의 비율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대학진학률이다. 1990년의 여성 대학진학률은 31.9%였다. 그러나 현재의 여성 대학진학률은 74.6%로, 남성의 67.2%보다 7.4% 더 높다. 20대 고용률 자체도 여성이 더 높다. 20~24세 고용률은 꾸준히 여성이 남성보다 50% 이상 높았으며, 25~29세 고용률은 2000년대 중반부터 10%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래는 경향신문의 특집기사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1990년대의 신입사원은 2016년의 청년세대와 불화한다. 1990년 무렵 사회생활을 시작한 40·50대들은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중산층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그들은 “힘들면 눈을 낮추고, 경력부터 쌓으라”고 말한다. 지금의 청년들은 눈을 낮추고 차곡차곡 인턴과 스펙을 쌓아도, 때로 정규직 문턱에 들어서도, 경제적 걱정 없이 인생을 출발하기 힘들어졌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기성세대 남성들은, 경제 호황기에 여성과 경쟁하지 않고 사회의 주류로 안착한 사람들이다. 반면 지금의 젊은 남성들은 저성장시대의 문턱에서 넘어졌는데, 여성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문유석 판사는 ‘해일’로 임금과 직업상 불이일을 꼽았지만, 여성들에게 임금이나 직업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젊은 남성들이 아니다. ‘고용주’는 보통 경제 호황기에 여성과 경쟁하지 않고 사회의 주류로 안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때리거나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몰카찍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자 비정상의 영역이다. ‘몇 년간 몇 퍼센트 증가’ 같은 자극적인 수사를 달아도, 저런 일들은 통계적으로 ‘비일상’ 혹은 ‘비정상’에 해당한다.

군대, 결혼비용, 더치페이 같은 것들은 ‘사회적/경제적 생존’에 ‘일상적 위협’을 받는 젊은 남성들의 양성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범죄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당연하게도 상당수의 젊은 남성들은 범죄자들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이가 없고 화도 나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남성들의 억울함을 ‘사소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남녀간 ‘분노’사이에 경쟁구도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일진대, 웬 아저씨가 강남역 먹자골목의 조개구이집 알바생한테 ‘해일이 오고있는데 팔자좋게 조개나 까고 있냐’고 훈계하면 듣는 알바생은 당연히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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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판사님이 허락한 페미니즘

‘여성차별’이라는 거, 문유석 판사가 ‘만든’ 건 아닐거다. 그러나 문유석 판사는 ‘일찍 태어난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수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8~90년대 사회 풍조를 떠올려 본다면 차별의 벽을 유지하는데 알게모르게 ‘기여’를 했을지도 모른다.

문유석 판사는 ‘큰 그림을 보라’고 말하기 전에 거울부터, 아니 최소한 자기가 속한 세대부터 돌아봤어야 하는게 아닐까. ‘조개줍는’ 젊은 남성들에게 ‘세상의 절반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기 전에 ‘해일을 만들어서 미안하다’라는 말부터 해야하는게 아니었을까. 결국 그 세상의 절반을 막고 있었던 것은, 문유석 판사와 같은 ‘나이든 남자들’이 아니던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말, 최근에 많이 들어봤다.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청하는 남성’을 조롱거리로 삼을 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문유석 판사의 ‘판사님이 허락한 페미니즘’ 글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페미니즘이라는게 결국 오빠는 안되는데, 판사님은 되는. 뭐 그런거였나 싶은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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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독자의 ‘선생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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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언론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기업의 압박이나 정부의 탄압 때문이 아니다. 진보 언론을 열렬히 지지하던 독자들이 ‘절독’을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왜 진보 성향의 독자들이 진보 언론들을 절독까지 하게 된 것일까?

‘일베’의 패륜을 비난하던 진보 언론들, ‘메갈리아’의 패륜을 옹호하다.

‘김치녀’라는 프레임에 분노한 여성들이 모여 ‘메갈리아(이하 메갈리아, 워마드 동일시)’라는 커뮤니티를 만든 후 ‘미러링’이라는 이름으로 무분별한 남성혐오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만큼 극단적인 수준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해져 커밍아웃을 원하지 않는 게이 남성들을 강제로 ‘커밍아웃’시키고, 무고한 남성들의 신상을 털어 SNS에 전시했으며,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단순히 ‘남성’이라는 이유로 조롱하는 수준까지 갔다.

이쯤 되면 그 대상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들의 열등감을 인터넷에 ‘배설’하는 전형적인 사회부적응자들의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여성혐오니 뭐니 하는 것들은 자신의 반사회적 성향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메갈리아의 이러한 만행들을 옹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진보 언론들은 남성혐오 단체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러자 진보 언론의 독자들은 “남녀평등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메갈리아의 행동은 남녀평등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진보 언론의 기자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생각이 옳고, 자신들이 독자들을 가르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메갈리아는 ‘여성운동’임이 분명하고, 독자들이 자신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보 언론들은 ‘무지한 독자’들을 근엄하게 꾸짖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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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보언론 안볼거야?

한겨레는 1면에 ‘메갈리아’를 박으며 ‘우리 사회는 메갈리아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기사로 독자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시사인은 ‘분노한 남자들’이라는 커버스토리로 메갈리아의 행태에 분노하는 정상적인 ‘남녀’를 대한민국 여성에게 분노하여 ‘자들자들’한 남자(분노/한남/자들)들로 묘사했다.

해당 기사가 나간 후 시사인과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독자들의 반발이 이어졌다. 그러자 언론노조가 운영하는 언론 미디어오늘에는 ‘메갈 기사 때문에 시사인 절독하겠다는 분들에게(김형민(산하) PD)’라는 기사가 실렸다.

“시사인의 메갈 관련 기사로 절독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면적으로 그 분노를 이해합니다. 왜 화를 내는지는 알겠다는 뜻입니다. 한편으로 나는 그 분노에 찬성하지 못합니다. 맞든 틀리든 내 생각과 전혀 다르거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짚어 주는 언론이란 소중한 것”

해당 기사는 독자들에게 ‘니들이 왜 화를 내는지는 알겠다. 그러나 너네들의 분노는 올바르지 못한 분노이다. 너네들의 잘못된 생각을 시사인이 집어줬는데 ‘미개’하게 분노하지 말라. 시사인은 소중한 언론이다.’는 ‘가르침’을 선사했다. 마치 분에 못이겨 길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5살 꼬마를 대하듯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니네가 좀 불편한 기사가 있더라도, 그것은 옳은 기사이며 너네도 우리가 없으면 볼 것이 없을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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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선생님’이 아니다.

진보 언론들의 최근 행태는, 자신들은 뛰어난 지식과 식견을 가진 ‘지성인’이고 독자들이 ‘계몽’이 필요한 ‘무지한 대중’이라는 식의 진보진영 특유의 엘리트주의적 사고를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매체이건, 독자들은 ‘무지한’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사람이다.

각자의 생업에 종사하느라 시시각각 일어나는 이슈들과 사회적 문제들을 체크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뿐이다. 기자들은 시간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취재를 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자’이지, 무지한 독자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니다.

언론은 독자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언론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건 맞지만, ’존재해야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식의 설명은 논리적으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론은 독자가 ‘봐주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특히 진보 언론들은 보통 진보 성향의 독자들이 없다면 유지조차 할 수 없다.

물론 독자의 입맛에만 맞추어 기사를 쓰는 것은 올바른 언론인의 자세가 아니다. 여론이 좋지 않더라도 ‘사실관계’가 맞다면 자신있게 기사를 쓰고 독자들과 치열하게 부딪쳐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지금 진보 언론들이 ‘메갈리아’의 만행을 옹호하는 행위는 ‘사실관계’에 조금도 부합하지 않는다. 심지어 진보 언론들이 추구하는 가치인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가르치고’있을 뿐이다.

 

진보 언론을 숨쉬게 하는 것은 누구인지 돌아봐야

진보적 성향의 독자들도 안다. 그들이 진보 언론을 구독하는 이유는 이 사회에 ‘다른’ 목소리도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진보 언론이 결코 똑똑하고 유능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취재력과 기획력만 본다면, 보수언론의 환경이 더 좋은 것이 사실 아니던가. 진보 성향 독자들의 진보 언론 구독은 대한민국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다.

진보 언론은 이쯤에서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오만함’을 내려놓는게 좋을 것 같다. 절독 흐름이 잠잠해졌다고 ‘이게 끝이야?’라고 판단하여 ‘갈테면 가라’라고 떠드는 것은 이 순간에도 인내하고 있는 다른 구독자들마저 떠나게 만들 ‘최악의 수’다. 본인이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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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은 당신의 자부심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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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언제 시작했는지, 그리고 언제 끝났는지 ‘보통 사람’인 나와는 하등의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관심이 없는 남의 잔치가 되어버렸다.

엘리트 체육인의 길은 보통 사람과 다르다. 초중고 내내 체육특기로 모든 수업이 면제된다. 특기자전형으로 무시험 대학 입학후에도 강의한번 나오지 않고 태릉 선수촌에 입촌시켜 운동만 계속 시킨다.

선수단에 포함되지 않은 선수들도 뭘하는지 알 수 없는건 마찬가지이다. 인기종목이든 비인기종목이든 국가정책으로 정부기관이나 공기업들에 소속되게 만든다. 업무를 하지 않아도 호봉에 따라 소속 기관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동료나 상사얼굴 한 번 보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반면 보통 학생인 나에게 중고등학교 체육시간은 ‘노는 시간’이었다. 아예 교실에서 잠을 자거나, 체육선생이 공 하나 던져주고 교무실로 들어가버리면 학생들은 열심히 볼을 찼다. 체육을 안좋아하는 친구들은 책을 가지고 나와 그늘에서 읽었고, ‘잘나가는 친구’들은 월담 후 학교 주변에서 뻘짓을 하고 돌아오곤 했다.

참고로 해외생활에서 접한 외국의 체육시간은, 다양한 종목들의 기본을 가르쳐주고 연습을 거친 후 경기를 하고 두각을 보이면 학교 팀에 소속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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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중, 고, 대학교의 운동부는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운동부는 어디까지나 체육특기생을 위해 존재한다. 운동을 하려면 공부를 포기해야하고, 공부를 하려면 운동을 포기해야하는 이상한 시스템 덕분이었다.

우리는 여전히 자위를 한다. 메달을 9개나 땄다고,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고. 학교를 12년간 다니면서 금메달을 휩쓸었다는 양궁은 커녕 국궁 한 번 잡아본적 없다.

사격 3연패를 한 나라이지만, 군생활 중 한번씩 쏴본 콜트 45가 전부다. 펜싱은 칼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해본적 없는건 물론이고, 아직도 돈 많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친목으로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종목이 골프다.

그 나마 부모들이 자식들 소외되지 말라고 대중적으로 시키는 태권도는 날림 승단심사와 바가지 편파판정에 오염된지 오래다. 군대에서 발차기 두번만 하면, 국기원에서 나온 뚱뚱한 아저씨가 1품을 준다. 괜히 돈들여서 승단할 필요 없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한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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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중국을 메달 수로 압도했고, 일본은 신체적 열세를 극복하고 육상과 수영을 휩쓸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 영국의 생활체육 시스템이 어떤지 관심조차 없다.

일본의 한 개그맨은 5년 전 방송중 게임 벌칙으로 마라톤을 시작해 이번 올림픽에 캄보디아 대표로 출전했다. 그리고 태릉의 국가대표 바로 뒤에서 골인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먹고 운동만하는 태릉의 국가대표들이, 다른 나라의 의사, 정비사, 경찰관에게 점수를 허락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조금의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체육시간에 너도나도 퍼자고 있는 나라에서 금메달 9개. 특목고나 자사고에는 체육부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금메달 9개. 자랑스러운가?

나는 이정도 먹고 산다는 나라에서 아직도 후진국형 메달레이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국가의 위상같은 소리는 이제 좀 그만했으면 한다. 런던 올림픽때 10위안에 어떤 나라가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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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드(THAAD)갖고 징징대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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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은 후쿠자와 유키치 이래로 ‘탈아입구’론을 주창하였다. 아시아를 벗어나서 구라파(유럽)의 강대국을 배우겠다는 사상이었다. 얼마 후 체급으로 게임이 안됐던 러시아와의 전쟁이 일어났다. 다행히 영국과 미국의 지원덕에 겨우 이겼다.

그 후 1차 대전에 참전했지만, 별다른 역할도 못하고 전쟁이 끝나버렸다. 그러나 일본은 어쨌든 연합군 편에 섰다는 이유로 뭔가 큰 콩고물을 기대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여도 없는데 그런게 떨어질 턱이 있나.

그러나 일본제국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 미국을 원망하였다. 그리고 영미 덕에 확보한 국제적 지위를 순전한 자국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중국의 만주를 침략하였다. 자신의 후견인인 영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결과였다.

동시에 탈아입구론은 스리슬쩍 들어가고, 유럽 침략자들에게서 아시아를 해방시키겠다는 대동아공영론을 내세웠다. 그전까지 메이지유신 이래 서양을 배우자던 겸손한 자세는 다 팽개치고 위대한 야마토를 외치는 극단적 민족주의로 돌아선다.

일본의 만주진출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던 영미는 ABCD(America-Britain-China-Dutch) 포위망으로 일본의 전쟁자원 수급을 봉쇄했다. 일본은 국력은 1/10이지만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심각한 정신승리를 시전하며 진주만에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았다. 한반도 북쪽의 어느 나라와 많이 닮은 모습이다.

어쨌든 일본은 영미가 유럽전선에 정신팔려 있을때 동남아와 태평양을 잠시 휘젓는듯 보였다. 하지만 진주만을 때린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미국을 건드렸으니 X됐음..” 이란 걱정 그대로 미드웨이와 과달카날에서 박살이 났다.

대세는 금방 기울었다. 초기 10:1(일본군 사상자 : 미군 사상자 비율)에서 후기엔 20~50:1의 교전비를 보였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뽑힌 일본제국은 1억 총옥쇄(전부 전사)를 다짐하였다. 그 결과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이었다. 그제서야 한없이 미약했던, 미국덕에 호가호위 했던 자국의 주제를 깨닫고 GG를 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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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돌려보자.

 

한국은 순전히 100%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킨 덕에 독립을 얻어냈다. 쟁취라고 하지 말자. 8.15 독립에 있어 한국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 만주의 무장투쟁가들? 시도는 좋았으나 이렇다할 결과는 없었다.

만주에 정착해서 노력해 잘 살아보려던 조선인들에게서 강제로 조폭의 보호세와 같은 독립자금을 갈취하기만 했을뿐 아무런 긍정적 효과를 주지 못했다. 독립군의 패배와 만주 거주 조선인에 끼친 민폐는 민족의 이름아래 스리슬쩍 은폐됐고, 승리는 침소봉대됐다.

비슷한 시기, 소련군은 8월의 폭풍작전으로 만주의 일본 관동군을 박살내며 한반도로 기세좋게 진격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이 소련군을 38도선에서 막았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이때 이미 한반도 전역은 구소련 스탄국중 하나가 됐든지, 김가 일당독재 공산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결과이건 과정이건, 한반도 남쪽의 절반만이라도 자유시장경제와 민주공화정을 이룬 것도 전적으로 미국의 덕이다. 한국인들은 혁명을 통해 왕정을 타파한 적이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왕정의 종말은 일제의 선물이었다. 마찬가지로 민주정을 쟁취한 적도 없으며, 자력으로 독립하지도 못했다. 민주정과 독립은 은 미국의 선물이었다.

이후 1950년,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북조선이 남침을 했다. 만일 자국 젊은이들의 피를 뿌리고 엄청난 전쟁자금을 투입하여 이를 막아준 미국이 아니었다면 한국은 진작에 제주도나 태평양 섬의 망명정부 국가로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국가 기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는 엉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립군과 마찬가지로 승전은 구국의 전투로 평가받게 되었고, 현리 전투 같은 졸전과 패배는 역사의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다.

반면 태평양전쟁때와 같은 감투정신으로 남의 나라에서 피 뿌리며 용감히 싸운 미군의 승전 기록은 축소할 수 없을만큼 당당했다. 미군이 없었으면 한국전쟁은 완벽한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이후 한국은 미국의 대외원조금액 세계 1위를 차지하며 경제성장 초기의 극빈곤을 넘겼다. 그리고 막대한 무역적자를 감수하며 한국 상품을 대거 수입해 준 미국 덕에 산업화를 이뤘다.

대일독립,국가수립,대소자주성확보,한국전쟁,빈곤탈피,산업화 모든 과정에 있어 미국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는 게 한국이다. 그 결과 한국은 현재 명실상부한 선진국이며, 경제발전에 따른 의식변화로 아시아 최고 수준의 민주화까지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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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좌파진영의 무조건적 반미가 시작된 게 전두환 정권부터다. 군부독재를 미국이 지원 혹은 방관했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하나만 묻겠다. 미국이 한국의 군부독재를 군대까지 동원해서 막아줬어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스스로 할 줄 아는게 대체 무엇인가? 이건 밥을 떠서 입에다 넣어달라는 얘기다.

정녕 미국이 군부독재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수구운동권들이 멀쩡한 남의 나라 문화원에 불을 질렀고, 매 시위마다 반미란 얘기가 빠지질 않는 것인가? 미국이 한국의 부모라도 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식민 종주국이 식민지에 대해 하는 일 아닌가? 군대를 동원해 남의 나라 정권교체 막기라니. 좌파는 그런 걸 바랬던 건가? 그리고 그들의 바람대로 87년 6월 항쟁의 성공은 미국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미국이 한국의 군부정권을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일본대사가 했다면 광화문이 전문 시위꾼들에 점령당하고도 남았을 말을 중국대사가 태연히 내뱉어도 조용한 게 한국 좌파다. 평생을 갚지 못할 은혜라도 중국한테 입은 것인가. 자기 부모한테도 이렇겐 못한다.

중국의 미사일이 한국을 겨냥하고 있지 있지 않은 바에야 한국이 대북방어용으로 배치한다는 미사일에 남의 나라 독립을 운운하며 감놔라 배놔라 인가. 중국 대사관에 불이라도 지르며 반중시위가 벌어져야 정상이다. 미국산 쇠고기, 한미 FTA엔 그리 득달같이 달려들어도 중국산 마늘파동과 한중 FTA에 대해선 조용하다. 이중잣대도 이런 이중잣대가 없다.

THAAD? 경북 성주만으로 모자라고, 수도권까지 안정적으로 방어하려면 충북에도 배치해 중첩방어를 해야 한다. 당연히 북조선 뿐 아니라 대중 방어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보자. 북조선이 악동이라면, 중국은 조폭이다.

좌파는 이번에도 광우뻥때같은 선동을 한다. 전자파 참외? 참외를 상공 2천미터에 매달아서 재배하는가? 거주? 미사일기지 범위 100미터 안에서 100미터 상공에서 거주하시려고? 애초에 거긴 군사 제한구역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주한미군으로 비롯된 지금 한국의 국제적 지위, 군사적 파워가 온전히 자국의 역량 덕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앞서 말했지만 중일전쟁 전 일본이 미국을 대하는 자세가 딱 이러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인은 은혜를 잊지 않고, 중국인은 원수를 잊지 않는다고 한다. 당연히 일본인의 자세가 최선이고, 중국인의 자세는 차선이다.

한국인은 그 모든 것을 잊는다. 최악이다. 미국이 한국에 베푼 은혜, 중국이 준 피해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이런 나라를 혈맹으로 믿고 함께 싸워주려 할까. 호구가 아니고서야.

미국에게 원폭까지 얻어맞고 처절히 박살난 일본이나,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모두 미국 앞에 좌절했던 독일조차 한국 정도의 정신나간 반미세력이 득세하진 않는다. 미국, 일본 글자만 들어가면 경기를 일으키는, 한국 좌파의 행태는 그냥 “사춘기 소년의 치기어린 투정”일 뿐이다.

ⓒ 시사인

공교육 개혁이 정말 최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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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인

‘명문대 나오면 뭐해 절반이 백수인데.’를 주제로 한 강연의 녹취록이 화제다. 15년에 걸친 기자 생활동안 한국 사회의 경제/교육 분야를 두루 돌아본 최중혁 기자의 강연록이다. 공교육과 사회 시스템의 개혁을 부르짖은 강연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의 공익과 합리성을 떨어트리는 폐해는 ‘그들만의 이너서클’에서 나온다. 법조계/산업계/의학계/체육계 어디에도 예외는 없다.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세상이 본래 그렇지 뭐’ , 또 하나는 자기도 이너서클에 들어가려 노력하는 것. 이너서클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은 그 해결책을 교육에서 찾아왔다. 그 결과 ‘영어 유치원 – 사립 초교 – 국제 중학교 – 특목고 – 명문대 코스’를 밟으려 기를 써왔다.”

“영어 유치원 3년, 사립 초등학교 6년이면 적어도 학비로만 1억원쯤 쓴다. 상위 10%에 들지도 못하면서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믿는 분들의 가랑이가 찢어져왔다. 그리고 그 선택의 ‘합리성’이 취업난으로 인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렇게 키워놓은 아이들이 취업을 못 한다. 대학 공시를 보면 SKY 대학의 취업률이 50% 안팎이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포함한 수치가 이렇다.”

“명문대 나오고 유학을 다녀와봐야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삼성전자도 현대자동차도 앞날을 낙관할 수 없는 시대다. 취업의 시대가 끝났다. 고용의 종말과 저성장을 동시에 맞이한 시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65%는 현재 세상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될 전망이다. 지식을 주입하는 교육은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평생 몰두할 업은 공부로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현장 경험으로부터 오는 직관’이 중요하다.”

“취업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을 교육에 대입해보면 ‘교과의 시대는 끝났다.’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아직 맞춤형 교육은커녕 경쟁 교육 단계에 머물고 있다. 교과의 시대를 멈추고, 교과와 비교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 적성을 찾는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교육에 대한 사고 또한 직선에서 순환식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대학교 졸업-취업-정년퇴직으로 이어지던 시대는 끝났다. 고교 졸업 후 창업을 했다 나중에 필요를 느껴서 대학에 진학하고, 다시 재취업이나 창업을 하는 미국인들의 순환식 사고를 참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부터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직선의 시대에 맞춰져 있는 사회 시스템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관료들도 순환적 시스템으로 전환할 미래 사회에 걸맞은 인프라가 무엇이고 우리가 어떤 정책을 선택해야 할지 끊임없이 모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 개혁’을 주제로 개최된 강연은 처음이 아니다. 가진 자들의 카르텔과, 함께 가지기 위해 ‘양반 자격증’으로 기능해온 대학 졸업장, 기름밥 장사밥 먹는 상인들 앞에서 근거없이 깨알만 죽여대는 사농공상주의, 이미 투입한 베이비부머-486세대의 자식교육비용에 대한 분석은 이미 여러 번 주목받아왔다.

얽히고 설켜있는 ‘비합리적’ 사회구조에 개선 방안도 쉴 새 없이 쏟아져나왔다. 최중혁 기자의 강연도 그 흐름의 연장에 있다. 결국 결론은 ‘교육’과 ‘시스템’의 개선이다. 그런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 이유가 있으니 변화를 찾기 힘든 것이다. 특히 현재 세상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될 현 시대의 초등학생들과, 초고령화 사회를 맞이할 2050년에 대안의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칠포세대

ⓒ 중앙일보

다시 말해서, 이미 부모에게서 독립적 가치관을 거세당하며 키워진, 대학 나오느라 꼴아박은 비용만 억 단위인, 현 청년세대는 어떻게 할 거냐는 거다. 그들은 새롭게 개편된 시스템을 기다릴 여유도, ‘순환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을 향해 개혁될 교육을 다시 받을 여력도 없다.

‘백년지대계’가 아니라 바로 코 앞의 ‘십년지대계’를 바꿀 수 있는 교육 서비스 개혁이 필요하다. 이는 덩치가 크고 반응이 느린 공교육으로는 당연히 힘들고, 사교육 시장이 기능해줘야 한다.

모두가 ‘대학’을 바라보았고, ‘대기업’을 꿈꿔왔으며, ‘양반’이자 ‘가진 자’가 되고자 했다. 그러나 현재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는 취업난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들은 이미 예전부터 ‘순환적’ 혹은 ‘현실적’ 사고로 선택을 해온 이들이다. 대학을 안 갔거나, 빠르게 중퇴하고 직업전문학교 혹은 폴리텍대학에서 ‘산업 기사’ 자격증을 취득해 커리어를 시작해온 이들. 남이 뭐라 하건 시장에서 구르며 정육점이건 핸드폰 대리점이건 각자의 ‘생존 방식’을 체득한 이들이 시대의 ‘현자’가 되었다.

화자

‘나는 아닐 거야’라며 애써 현실을 외면해온 청년들의 비합리적 현실감각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먹은 ‘힐링힐링’과 ‘가능가능’. 그리고 ‘힐링’과 ‘가능’위에 세워진 사교육 시장이 붕괴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본다. 시장은 가장 빠르게 ‘현실’을 반영하지만, 기사에도 나오는 것처럼 부모-자식-사회 전부가 눈이 멀었던 ‘비합리적’ 소비자 성향으로 여기까지 버텨온 곳이 바로 취업-사교육 시장이다.

‘성공’이 아닌, ‘명예’가 아닌, ‘꿈’과 ‘희망’과 ‘이상’이 아닌, ‘현실적 생존’을 핵심 비전으로 삼는 사교육 시장 개편을 고대한다. 공교육과 시스템 개편을 기다리기에, 오늘도 청년들의 현실은 냉혹하다.

 

티비조선

이 지구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 원화를 사용하기 위해 해외를 나가시는 분들, 예컨대 여행이라들지, 공무원 해외 순시, 어학연수 및 조기유학 등을 다녀오신 분들 중 선진국의 피상적인 모습만 보고 부러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선진국의 좋은 점을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만, 마치 그 나라는 천국이고 우리나라는 지옥이라는 식의 묘사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답답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2015년 IMF 기준 구매력 고려 1인당 GDP는 3만 6천 불로 일본에 이어 28위이다. 인구가 극히 적은 소국을 제외하고 제일 높은 나라는 5만 5천 불 규모의 미국이다.

gdp

*자료 참조 :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countries_by_GDP_(PPP)_per_capita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하는 독일, 영국, 스웨덴 등이 다 4만 불대에 있고, 뉴질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은 우리 아래에 있다. 그리고 이런 ‘고소득 국가’라고 해도 한국보다 삶의 질이 몇배씩 좋고 그런건 아니다. 명목 GDP가 8만 불인 스위스도 막상 가보면 빅맥세트 하나에 1만 3-4천 원하고, 한식당 가서 김치찌개 하나 먹어보려고 해도 3만 5천 원정도 한다. 8만불을 벌어도 물가가 워낙 높으니, 실질적인 소득 가치는 지표가 보여주는 것보다 낮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앞으로 우리나라의 경제가 성장하여 명목 GDP가 쑥쑥 올라도 그에 따른 물가상승률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우리의 삶이 그다지 나아질 리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미 물가를 고려한 우리의 소득은 영국,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양극화 문제를 꺼낼 분도 계시겠지만, 토마 피케티 열풍에서 보인 바와 같이 양극화는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세계적인 문제이다.

대략 십 년 전쯤, 미국에 다녀와 모기지론 예찬을 하는 분들이 많았던 걸 기억한다. 미국은 돈이 조금밖에 없어도 너도나도 주택을 구입할 수 있고, 정부에서 보증을 해주기 때문에 30년 정도 길게 보고 상환하면 된다고. 우리나라같이 중산층이 서울에 집 한 채도 못 구입하는 곳에 비하면 미국은 훨씬 좋은 곳이라고.

ⓒ 디지털타임즈

그 무분별한 모기지론 때문에 세계경제가 망할 뻔했다. 거칠게 얘기하자면, 2008년 금융위기는 개인의 신용등급 혹은 소득을 고려하지 않은 불량채권들을 서로서로 돌려먹다 결국 폭탄이 빵 터져버린 결과다. 물가가 비싼 선진국에서는 그만큼 주택의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고, 개인의 소득 수준에 맞지 않게 무리하게 대출을 해준다면 그것은 해당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혹자는 또 연금을 가지고 부러워한다. 유럽이나 호주 같은델 가면 연금이 있어 노인들이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다고. 어느 정도 맞을 수도, 혹은 틀릴 수도 있는 말이다. 현재 유럽의 노인세대는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연금제도를 충실히 이행했고, 그만큼의 출산율이 따라와 줬기에 현재의 연금수령이 가능한 것이다. 헌데 몇 년 전 이탈리아 연금 민영화 대란에서 보여줬듯이, 그 제도 역시 영구적이진 않다. 지금 20-30대인 우리가 연금을 수령하는 2040-50년대에는 그 어느 나라도 연금을 제대로 지급한다고 자부할 수 없다. 지난달 그리스 의회는 구제금융 요건 충족을 위한 연금지급액 삭감안을 통과시켰다.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덴마크나 네덜란드에 다녀오신 분들은 그 많은 자전거 대열에 놀란다. 그들은 참으로 친환경적이어서 국회의원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출퇴근은 다들 자전거를 애용한다고. 그래 거기까진 좋은데, 그 피상적인 것만 보고 온 공무원들이 우리나라 지천에 깔아 놓은 자전거 도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세금낭비 이런 세금낭비가 없다. 뭐 자전거 애호가들은 좋을 수 있겠지만, 현재 대부분 마모되고 요철이 많은 그 자전거 도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다지 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연간 유지/보수비용만 더 들뿐이다.

덴마크에서 가장 높은 산은 유딩스코호이 언덕인데, 해발 170m이다. 한반도 남쪽 제일 높은 지리산은 1,915m이고 남산은 262m이다. 지금 눈을 들어 창문 밖 아무 동산이나 찍어보시라. 우리나라에선 대략 동네 뒷산도 다 100m가 넘는다. 일단 지리적인 관점에서 덴마크는 자전거 타기 딱 좋은 평지이고 우리나라는 아니다. 덴마크의 기후를 보자면, 위도가 중강진보다 높은 55도 대임에도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12월 평균온도가 2.2도, 8월 평균온도가 17.2도다. 정말 연중 자전거 타고 다니기 딱 좋은 날씨다. 반면 우리나라같이 겨울에 꽁꽁 얼고, 여름에 전 국토가 40도 언저리를 넘나드는 날씨에는 일상에서 타고 다니기 쉽지 않다.

(상기 모든 데이터는 여기 참조 : en.m.wikipedia.org/wiki/Denmark)

마지막으로 덴마크의 자동차 취득세는 180%고, 부가세는 25%다. 3천만 원짜리 소나타가 가뿐히 5-6천만 원을 넘어간다. 그리고 높은 주차요금, 보험비, 유류비를 고려하면 보통 사람들은 자동차를 이용하기 어렵다. 혹시 여기서 우리도 이렇게 자동차세를 올려서 자전거를 이용하자고 하시는 분은 없길 바란다.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해발 1백 미터를 넘나들며 자전거를 타라고 하는 것, 그것이 지옥 아니겠는가.

출근길이 다 끝나간다. 주제가 뭐였더라. 아, 천국. 지구 상에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뭐 우리나라가 아주 잘나고 살기 좋은 나라라고 이야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헌데 내 돈을 써가며 잠시 잠깐 그 선진국의 인프라를 이용해본 것만 가지고, 그 나라 사람들과 대화해본 몇 마디를 가지고 사대주의에 빠진다면 곤란하다. 디테일하게 분석해서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은 들여오고, 맞지 않는 것은 적절히 걸러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 봤으면 좋겠다.

몇 년 전 북유럽 설계사로 연봉 1억과 함께 이직했다가 1년이 채 안되어 돌아온 선배가 생각난다. 아내와 애 둘이 있는 그 선배에겐 아무리 연봉이 1억이 되더라도 50%대에 육박하는 최고세율과 높은 물가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유럽에서 근무할 때 도시락을 싸다니던 연봉 수천만 원짜리 아저씨들이 언뜻 떠오른다. 선진국이란 말은 다른 말로 물가가 어마 무시한 곳이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박원순

원숭이도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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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핑턴포스트

사육사가 원숭이에게 돌을 준다. 돌을 사육사에게 돌려준 원숭이는 상으로 오이를 받는다. 몇 번 같은 일을 반복한 원숭이가 갑자기 상으로 받은 오이를 밖으로 던진다. 왜일까? 바로 옆에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한 원숭이는 오이보다 맛있는 포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동일한 일에 차별 대우를 받으면 원숭이도 화를 낸다. ‘쟤는 저거 주고, 나는 왜 이거 줘?’ 간단한 이야기다.

 

구의역 사고의 핵심은 불평등이다. 차별적 임금과 인력 구조가 문제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은, 능력에 따른 정당한 차등 성과가 아닌 불합리한 차별을 의미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이 가져가는 보상과 회사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이 가져가는 일 말이다.

 

은성 PSD는 이 차별과 불평등의 온상이었다. 은성 PSD는 기본적으로 수리업체다. 무언가를 스스로 기획하기보단 하청을 받아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그렇다면 회사의 인력 구성은 현장 수리공이 대부분을 이뤄야하며, 회사의 자본 역시 이들에게 집중적으로 투자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은성 PSD는 서울 메트로 임직원의 ‘대피처’였다. 퇴직 시기가 되면 은성 PSD의 관리직으로 내려가 메트로에서 받던 임금의 80%가량을 보장받는다. 고용승계, 임금승계, 복지승계 온갖 승계를 받았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만일 은성 PSD가 메트로만큼 큰 회사라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울메트로는 규모가 큰 공기업이며 높은 연봉을 받는다. 은성 PSD가 아무리 커봤자 1000만 서울 시민의 발만큼 클 수가 없다. 결국 서울메트로에서 받던 연봉의 80%를 보장해주고, 정년을 지켜주려면 누군가의 임금을 착취하는 수밖에 없다. 고용승계를 받는 메트로 직원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니, 결국 현장수리공의 임금이 줄어든다. 수리업체에서 400만원가량 받는 관리직을 위해 현장수리공이 착취당하는 구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철밥통

ⓒ 채널A

CBS의 보도에 따르면 현장수리공의 평균 월급은 180~220만원선이다. 죽은 김군의 월급은 15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했다. 실습생을 직원처럼 채용해 일을 시키는 건 불법이다.

 

결국 메트로 정규직 직원의 고용승계, 임금승계, 복지승계를 위해 비정규직 청년이 희생된 상황이다. 정규직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나 같은 노동자인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이 아니라고 볼 순 없다. 이와 같은 구조에선 정규직의 고임금과 고용안정성은 비정규직의 것을 빼앗아야만 나온다. 나의 행운은 남의 불행을 빨아먹고 자란다고 누가 그랬던가. 은성PSD의 정규직이 누리고 있는 현재는 같은 회사의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의 현재와 미래를 ‘후려쳐서’ 나온다.

 

구의역 사고의 배경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있는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 기득권은 노동자를 착취한다. 노동 기득권인 노동귀족은 비정규직을 착취한다. 결과적으로 이 불평등한 노동시장 안에서 정규직은 고임금, 고용안정성을 가진 노동귀족이다. 연말정산 파동만 봐도 그러하다. 상위 30%에게 세금을 물리는 일인데, 세상이 망하는 것처럼 말한다.

 

기득권은 이미 이권을 중심으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직은 자신들의 잇속에 밝다. 반면 비정규직 청년, 하청 청년, 주변부 노동을 하는 청년은 조직화되기 어렵다. 카르텔을 형성할만한 이권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시장 기득권의 고임금은 청년들을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만든다. 가진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미래 세대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구의역 사고를 보면서 나는, 혹시 노동시장의 기득권들이 청년세대를 원숭이보다 못한 존재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불평등은 원숭이도 화내는 일이다. 그러나 노동시장의 기득권들은 청년세대가 불평등에도 화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지금의 청년세대는 원숭이보다 못한 존재인걸까. 나는 구의역 사고를 보면 화가 난다. 당신은 어떠한가?

반포자이

남의 돈으로 싸게 사는 반포자이

대한민국 주거정책의 바른 방향은, 우선 전세계에서 한국에만 존재하는 ‘전세’라는 무임승차 체계의 소멸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나아가 주거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월세’ 중심의 시장 개편 방향을 인정하는 한편, 뉴스테이 같은 월세주택의 공급을 지원해야 한다.

 
이 중 경제적 취약계층에 대한 최저주거권 보호정책으로, 최소한의 보증금과 시장가격 대비 낮은 월세를 부과하는 공공임대주택을 보급하면 된다. 단, 그 대상과 품질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집을 ‘못’사는 사람과 차임을 ‘못’부담하는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 공적자금이지, 집을 ‘안’사는 사람과 차임을 ‘안’부담하려는 사람을 위해서는 단 한푼도 쓰여선 안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서울/수도권/광역시 기준 전세금 1억원, 지방 군단위 기준 전세금 5천만원 이상을 조달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공적자금을 통한 주거복지는 불필요하며 부당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 조금 좁거나 안 좋은 입지의 집을 매입할 수 있음에도 투기적 관점(시세상승에 대한 비관), 구매력 대비 주거허세(학군,넓이,교통 등), 공동체에 대한 기여 회피(취득세,재산세 등 아무것도 납부하지 않음)를 누리기 위해 집을 ‘안’사는 것일 뿐이다.

 
해당 기준선에 미달하는 주거취약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에도, 분양면적 16평(전용면적 12평, 방1~2개+거실+주방+욕실)을 공공임대주택 품질의 최상한선으로 놓고 그 이내의 범위로만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당연히 편의시설은 전부 삭제하고, 주차장은 지상으로 올리며, 자재는 최저급을 써서 비용을 최소화 해야 한다. 그 이유는 후술.)

 

 

휴먼시아

ⓒ 휴먼시아

1~2억원짜리 강북,경기도의 아파트/다세대 주택, 몇천만원짜리 지방의 아파트/다세대 주택이라도 그것을 매입하여 거주하는 사람들은 매입 시점에서 취등록세를, 보유기간동안 매년 재산세를 관할 지방자치단체 앞 납부한다. 주택채권 매입 또는 할인을 통해 공공임대주택 마련의 재원 또한 공급하며, 중개보수와 인테리어비 등을 지불하여 지역 중개사와 업자들의 일자리도 공급한다.

 
그런데 동액의 보증금을 내고 전세를 사는 사람들은? 대체 공동체에 어떤 경제적 기여를 하나? 싼 집이라도 자기 집을 매입해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들은 단 한푼의 세금도 내지 않는다. 그러면서 공적자금으로 마련된 인프라는 모두 활용하니, 사회에 프리라이딩 하는 무임승차자들이다. 4억원 주고 강북 24평 아파트를 매입한 사람과, 같은 돈을 주고 같은 단지의 32평 아파트에 전세사는 사람 중 전자는 강자이고 후자는 약자인가?

 
근본적으로 전세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 전세를 놓는 것은 시세변동의 리스크를 제거하면 어떤 경우에도 손해보는 장사다. 막말로 10억원주고 집 사서 8억에 전세놓는 사람은 취득비용 4천만원 + 매년 재산세,감가상각 부담해가며 8억원 은행에 예치하는 것보다 그냥 집 안사고 전세 공급 안하면서 10억원 은행에 예치하는게 남는 장사라는 건 초등학생들 산수만 해도 안다.

 

 

즉 집값이 취득/보유비용과 기회금리를 모두 커버하는 이상으로 올라버리는 바람에, 매도를 통해 차익을 챙기는 자본이익실현 외에는 그 어떤 공급의 유인도 없다는 이야기다. (시세변동의 상하방 리스크중 상방에 대해서는 비용 떼고 양도소득세까지 들어가지만, 하방에 대해선 어떤 보상도 없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과 누군가의 일방적 무임승차 폭리를 전제로 하는 체계가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도 집값이 안정추세를 보이면서 전세 소멸을 향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공적 기금으로 이런 호구질을 해달라는 건 대체 무슨 공짜심보인가.

 

 

언더도그마

ⓒ 언더도그마

 

 

집을 산 사람은 자기 집의 귀속임대료(집 살 돈으로 다른 데에 투자를 했다면 벌었을 돈, 자기 집에 자기가 거주하지 않고 남에게 임대했다면 받았을 돈)만큼을 대가로 지불하고 살고 있고, 월세입자 또한 임대료로 공급자에게 거주에 따른 비용을 지불한다. 전세만을 바라는 사람? 전세금의 기회금리를 계산해보면 월세입자의 절반 수준의 대가만을, 심지어 임대료가 아닌 기회비용의 형태로 부담할 뿐이다. 남의 돈, 서비스로 효용을 누렸으면 대가를 지불하는건 당연한 거 아닌가.

 
공공임대주택 품질의 상한선을 분양주택 품질의 하한선 아래(전용 12평, 최소한의 건축비로 최저한의 품질로 공급)로 제한해야 하는 이유는 ‘경제정의’에 있다. 공공임대주택을 마련하는 재원은 주택 구매자들이 납부하는 세금과 주택채권매입(할인)에 의한 것이다. 열심히 일해 돈벌고 세금내서 1억원짜리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공공임대주택 제공하라고 1억짜리 집에 사는 사람이 낸 세금으로 2억원 상당의 공공주택을 제공한다? 세금내는 사람을 호구로 보는가? 분명히 임대주택의 질은 분양주택의 최저한보다 낮아야 한다. 한국의 공공임대주택은 지나치게 질이 높다. 그러니 소득과 자산을 숨겨가면서 수서,일원동의 임대주택에서 대형차를 굴리는 공공임대주택 입주자들 같은 자들이 속출하는 것 아니겠는가. 무임승차 권장사회다.

 
임대주택 정책중 최악의 정책은 오세훈이 서울시장 재임시절 저질러 놓았던 SH공사의 ‘시프트’다.

 

 

매매가 10~11억원, 전세가 8~9억원의 반포자이 26평형의 시프트 전세가가 4.7억원이다. 이 돈이면 강북 홍제동의 30~40평 아파트를 매입할 수 있고, 마포 신축 30평 아파트에 전세를 들어갈 수 있다. 5억원에 가까운 현금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을 과연, 최고급 주거지의 특급 아파트에 세금한푼 안내면서 기생하게 할 이유가 있는가? 심지어 재건축 아파트 조합원들과 서울 시민들의 세금 위에 세워진 아파트이다. 하루빨리 철폐되어야 한다. 시프트 소득여건 만족시키는 부유층의 백수 자제라든지 충분히 강북 아파트 살 수 있는 중산층에게 10억원짜리 아파트를 4.7억원 내고 살게 해주는게 말이 되는가? 그 비용을 도봉구 쌍문동 3억원 아파트 사는 사람의 세금으로 충당하는게 올바른 구조라고 보이는가? 심지어 이게 강남의 웬만한 재건축단지마다 ‘소셜믹스’까지 한답시고 로얄층들에도 박혀있다.

 
양재동 경부고속도로변에 양재우성아파트가 있다. 90년대에 지었고, 주차장도 부족하고, 낡았다. 그런데 그 건너편엔 지하주차장까지 완비하고 넓은 최신평면의 양재리본타워 라는 시프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양재우성아파트 주민들은 낡은 집을 취등록세, 중개보수 내고 사서 인테리어 비용 들여가며 고치고, 매년 재산세를 부담하고 있는데, 양재리본타워 시프트 입주자들은 훨씬 넓고 안락하며 편안한 주택에 세금한푼 안내며 공짜로 살고 있다. 강남의 수서, 일원, 세곡지구, 서초의 우면, 내곡지구 등에 가면 아주 흔한 풍경이다. 이 외에도 송파 장지, 마천지구, 마포 상암지구 등. 심지어 자기 돈내고 집 사서 자기 세금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은 멀리 서판교에서 마을버스 이용해 판교역까지 들어가는 불편을 감수하는데, 훨씬 좋은 입지의 초역세권 동판교에는 다른 사람들 세금으로 임대아파트 단지를 조성해 놓았다. 이게 올바른 일인가?

 
무엇보다, 무슨 서울에서 몇년을 모아야 집 한채를 산다 라는 류의 선동도 그만 봤으면 한다. 한국정도 되는 나라의 글로벌 도시 중 금수저가 아닌 이상 일반 직장인이 보편적으로 몇 년간 자기 돈만 모아서 집 살 수 있는 도시는 없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20~30년 장기 모기지 땡겨서 집 산다. 월세를 고정 주거비용으로 생각하든지, 그 돈으로 장기 모기지를 부어서 자기 집 만들든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공짜 좋아하는 한국인들처럼 ‘전세’ 내놓으라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참고로 선진국의 LTV는 한국보다 훨씬 헐거운 기준을 적용해 대출비중은 더 높다. 그리고 소득대비 주택가격과 주거비용(월세) 모두 한국은 OECD 국가중 가장 저렴한 편에 속한다. 즉 집을 매입하기도, 월세를 살기도 착한 가격의 헤븐조선 이라는 얘기다.

 
도시 1억원(군읍면 5천만원) 이상의 전세보증금을 마련 가능한 사람에겐 그 값의 집을 사든지, 아니면 대출을 용이하게 해주어 레버리지를 끼고 좋은 집을 사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 몫의 취득세와 재산세를 내면서 공동체에 기여하도록 만드는 대출-주택매수 활성화가 올바른 주거복지 대책이다. 이런 면에서 지난 몇년간의 대출 확대, 거래활성화 대책은 옳은 방향이다.

 
대학에서 팀플할때 항상 있는 프리라이더들. 누군가가 다 준비해 놓으면 이름만 살짝 올리는 사람들. 지금 한국의 주거복지는 대학의 주먹구구식 팀플 학점 부여만도 못한 인센티브 체계다. 열심히 한 사람에게 C를, 이름만 올린 양심불량자들에게 B를 주고 있는 거 아닌가.

 

유전자

이기적 유전자

유럽 법제도를 모방한다해도 한국이 따라갈 수 없는 근본적 이유가 있다. 역사/문화적 차이라고? 지식인들이 한참 돌려말한 거다. 정확히 말하자면 문과적 표현은 국민성이고 이과적 표현은 유전자다. 둘 다 같은 의미지만 이과적 표현이 더 참신해서 후자를 더 애용한다. 그러니까 유럽은 되는데 한국이 잘 안되는 건 순전히 유전자 때문이라는 거다.

 

 
복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대한으로 누리고 싶지만 내 돈으로는 안 된다는 이기적유전자. 언제였던가. 현 정부를 극도로 혐오하던 후배와 몇 마디 나눴드랬다.

 

 

“그러면 복지해야겠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죠”

“그럼 정부가 증세하는 것은?”

“서민 등골을 빼먹는거죠”

 
대화가 끝난 후 본인 소유의 랜드로버를 끌고 유유히 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아메리카노

 
얘 말고도 많다. 우리 모두가 서민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기득권에 분노했다. 누가 서민이고 누가 기득권인지도 모르겠다. 실체없는 분노였다. 논리적 정합성은 문제 되지 않았다. 그 분노 자체가 멋져서다. 평소 관심도 없던 사회 문제를 두고 아주 당연한 말로 기득권을 꾸짖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 대견스러운 거였다. 논리를 찬찬히 뜯어보면, 담론에 껴들 능력은 안 되는데 있어보이고 싶어서 밑도 끝도없이 구조니 맥락이니, 논리 구조부터 엉켜있는 ‘논리구조맹’이 반. ‘사람이라면’, ‘인간이라면’, ‘니 아들이라면’, ‘니 엄마라면’. 시작부터 자격 들먹이며 도덕적 우위를 선점한 후 약자의 권위로 합리를 깔아뭉게는 ‘아가리천사’ 반.

 
논리구조맹과 아가리천사들이 실컷 떠든 후 내려오는 길에 박수받고 환호받고 희열을 느끼면 그게 그렇게 스스로 대견스러운 거다. 그들에게서 ‘분노’는 그렇게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됐다. 그렇게 걔들이 판을 이상한 쪽으로 키우는 바람에 결국 논의의 방향은 괴상한 대책을 내놓을 수 밖에 없는 구조로 흘러가버린 거다. 증세없는 복지라느니 사회적 기업, CSR 죄다 그런 구조 안에서 탄생한 기형아들이다.

 

 
나만 빼고 전부 악당이라는 잔혹 동화 속 이기적유전자들의 불평불만에 진이 빠지는바람에 나는 그렇게 기득권의 개가 됐고 그 조롱에 꽤 익숙해져버린 어른이 됐다.

 
그런데 걔들은 아직도 자신을 ‘캡틴 서민이카’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자기가 친구보다 잘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스타그램으로 알아차리고 여기에 무려 ‘사회구조적 모순’ 근거로 들며 무능의 책임을 외주화하는 애들이 말이다. 그런 논의는 ‘캡틴 아메리카’가 국방부장관과 해야할 얘기인데 말이다.

 

 

그렇게 기득권의 개가 되버린 나는 그저 ‘스타크 사’의 말단 직원으로 일하며 소득세를 열심히 내고 있다. 이기적유전자들이 꿈꾸는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나는 소득세 열심히 내고 있다는 얘기다.

 

 
나도 증세를 반대한다. 걔들과는 다른 이유로.

 

인문학 커버2

인문학을 폐하라

인문학의 위기?

 

2014년 기준, 전국 대학생 중 인문계열 취업률은 45.5%, 전체 평균은 54.8%이다. 취업자 중 전공 불일치 비율은 인문계열 44.9%, 사회계열 30.5%, 공학계열 23.4%이다. 공학계열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일자리를 갖는 것이다. 이는 인문학교육이 초고도자본주의체제인 현대사회의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누구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라. 위기는 ‘위험한 시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다시 말해, ‘문사철이 위험한 시기’인게 아닐까. 문사철이 위험한 시기라. 이 표현에서 출발하는 나의 빈한한 상상력은 다음과 같다. 문사철 출신들이 취업이 어렵다. 그래서 문사철 전공을 택하는 학생이 없어진다. 그 때문에 교수님들 월급주기 어렵다 정도?

 

이번에는 위기라는 단어를 넣은 다른 표현들을 생각해보자. 이공계의 위기. 공학의 위기, 경영학의 위기, 국가경제의 위기, 제조업의 위기. 대개의 ‘위기’들은 함께 짝지어지는 단어의 전망이 안 좋거나, 해당 산업지형에 인력이나 투자가 부족한 상황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사철’의 전망이 좋았던 적이 있던가? 애초에 ‘문사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산업지형이라는게 존재하긴 하는가? 80년대에 문사철 전공했던 어른들도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야 그때도 문사철은 취업이 어려웠어.’

 

졸업할 때가 되어 알았지만, 문사철은 철저하게 학계의 권위로 움직이는 곳이다.(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문사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본 텍스트다. ‘석학’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스타가 훗날 ‘고전’이라 불릴만한 무언가를 새로이 내놓지 않는 한, 대부분의 연구는 ‘2차 텍스트’에 해당한다. 실제로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 나아가 전공자 또한 본인들이 아는 ‘인문학자’의 이름을 당장 열명, 기껏해야 스무 명 이상 대기 어려울 것이다. 열명이라도 되면 다행이다. 최신의 ‘인문학자’라고 해봤자 겨우 지젝이 아니던가.

 

게다가 문사철은 현대사회에서 ‘데이터’가 중심이 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문’이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 여기서의 ‘쓸모’란 산업과 노동을 위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인문학은 원래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론은 동시에, 인문학이 근대 이후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기초적’일 수는 있어도, ‘핵심적’인 무엇은 아님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노동과 소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문학이 ‘흥하는’ 분야도 있다. 대표적으로 출판과 강연시장이다. 사학, 철학, 사회학, 정치외교학 4전공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젝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내리고, ‘교양인문학’이라는 분야의 서적이 주기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대중인문학자’라는 사람들이 1년에 몇십억을 벌어들인다. 심지어 대기업은 임원들을 모아놓고 ‘인문학 연수’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문학’은 대체 무엇이고, 왜 위기라고 불리며, 동시에 흥하는 시장이 발생하는 이유는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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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변화했는가

 

흔히 인문학을 문사철로 부르긴 하지만, 인문학은 원래부터 문사철이었을까? 인문학의 본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Liberal Arts 혹은 Humanitas라는 개념이 어디서 왔는 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Liberal Arts의 어원은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기술(학문)’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정립된 개념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문학(Liberal Arts)는 철저하게 ‘시민의 교양지식’이었다. 문사철이 중심이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로서는 실용지식에 해당하는 웅변, 수사학, 문법 등도 포함되었다. 보에티우스가 6세기경 ‘4학(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너무 다양한 학문을 인문학이라 불러서 실질적인 구분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시민’은 보편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이전의 개념이라, 실질적으로 노예를 소유한 ‘지주들을 위한 지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로마의 ‘시민교양지식’은 중세로 오면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합쳐져서 7학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의 시민교양지식’은 ‘(평등한)인간 중심’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세는 철저하게 ‘귀족 중심’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대의 시민교양지식은 점차 제왕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쉽게 말해 중세의 인문학은 귀족을 위한 ‘사적인’ 교양지식이 되었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성직자 교육과정 안에 녹아들기도 하였다.

 

문사철 중심인 지금의 인문학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인본주의(평등)’가 스며든 것은, 근대의 일이다. 보편민주주의라는 시대의 새로운 개념이 교양지식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근대를 통해 인문학은 드디어 ‘보편시민교육’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Liberal arts(자유인의 학문)에서 Humanities(인간학)으로 변모하게 된 시기도 근대이다. 근대국가의 정립으로 공교육 중심의 보편교육은 ‘귀족교육’대신 ‘시민교육’을 제공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문사철 중심의 인문학이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보편교육으로 기능하는 것은 대부분 1900년대 부터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인문학(그리스의 시민교육과, 중세의 귀족교육)은 근대에 의해 재편되었다. 근대를 이끌어 낸 이성 중심의 사고체계들은 과거의 교육들을 편집하고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로 전근대의 흔적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신 중심 인간학’을 주장했던 학자들의 자취는 줄어들었고, 근대를 이끌어낸 ‘이성 중심 사고’가 부각되었다. 동시에 과거에 인문학으로 분류되었던 자연과학은 독립적인 학문이 되었고, 신생학문인 사회과학이 탄생했다.

 

동양의 경우에는 대대로 사농공사의 사(士), 즉 선비계급이 인문학적 지식을 독점했다. 농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실용지식을 제외하곤 농/공/상 계급에게 지금같은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문학도 근대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였다. 문사철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근대지식인 중심으로 공유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사철을 보편교육으로 만든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찍이 ‘자유교양협회’를 만들고, 전국의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서구 고전 중심의 ‘자유교양대회’를 8년이나(1968~1975)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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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학의 인문학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인문학’은 과연 ‘근대시민 보편교양’으로 작용하고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서 ‘보편교양’보다는 ‘근대시민’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는 ‘서울 명문 사립대’라 불리는 곳에서 국어국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4학년이 되어 이제 국어국문학은 실질적으로 끝났고, 사회학만 조금 남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은 우리학교 인문학 전공자들은 과연 ‘근대시민’이 가져야 할 ‘보편교양’을 얼마나 습득하고 있을까? 물론 훌륭한 시민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서강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장실에 가면 변기 앞에 붙어있는 스티커로 알 수 있지만, 서강대는 인문학 중심 교육을 한다고 자랑스레 광고까지 하는 학교이다. 대한민국의 수험생은 학업성취도로 대학을 진학하고 있으니, 서강대보다 ‘대학 서열’이 높아도 큰 차이가 없거나, 최소한 낮을수록 더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어느 대학을 가서 문사철 전공자를 붙잡고 물어보아도, 근대/근대성/근대적 사고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중 하나만 되어도 대단히 많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고등학교 수능 공부와 대학의 교양 및 전공에서 ‘근대’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가 무엇이고, 근대를 이끈 사건들이 무엇이며, 근대의 핵심적인 사고가 무엇이라고 제대로 배운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총체적인 근대성 개념을 알게 된 것은, 독학 덕분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 덕에 군대에서 상당히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전역할 때가 되니 ‘근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이할은 사회학 복수전공 덕이었다. 국어국문학과 기타 인문교양의 좁은 세계에 갇혀있던 나에게, 사회학 복수전공은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정량적 접근법의 중요성을 사회학을 통해 알았고, ‘인문사회학’이 근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지식체계임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시민과 시민사회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 사실 인문학의 세계에서도 통용되었지만,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사회과학적 접근 방법에 대해 ‘비인간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이런 ‘반과학적’사고에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러한 사고가 그들의 지적 게으름과 우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확증편향, 그리고 도그마가 결합한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도그마의 총체는 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수들은 나의 근대 중심 사고와 그 결과물인 리포트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교수들은 근대는 물론이고 후근대적 에센스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반면 학생들은 근대적 사고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후근대적 에센스를 전근대-근대-후근대라는 맥락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저 독립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수들에게도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체계를 ‘근대시민적’ 사고체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책임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대한 자각만 있어도 어느 정도 ‘실용적인’ 학부 졸업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인문학의 ‘반실용성’은 학생과 현 교육시스템에 대한 무관심이 조장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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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학, 새롭게 변해야 할 때

 

그러므로 현재의 인문학은 현대에 맞는 인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을 통해 현대산업지형에 적응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재의 인문학이 ‘쓸모 있는’ 분야는 교수의 밥그릇 뿐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인문학은 원래 산업지형을 위한 교육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대학’에서 전체 인문계 학생중 30% 이상이 문사철을 배우는 걸까? 문사철 학생들은 노동할 필요가 없는 특권계급이라도 되나?

 

현재의 인문학은 하루빨리 ‘근대시민교육’에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현대산업 지형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변해야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도 대거 포함되어야 한다. 현대 산업지형은 이미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도 ‘무용’하다 판단하는 추세이다. 알고리즘과 로봇노동기술이 발전하고 각 산업분야에 적용될수록 사회과학의 강점인 ‘정량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숫자 기반 실용성’ 또한 급격하게 추락할 것이 자명하다.

 

우선 현재의 인문사회학 교육은 데이터적 사고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데이터를 근거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데이터를 놓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과학(자연과학+사회과학)과의 융합이 당연히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지금처럼 데이터 중심의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밀리는’ 인문학이 아니라, 데이터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과학은 유용하고 인문학은 무용하다’는 명제를 넘어서, ‘과학이 유용하다면 어느 분야에, 어떻게 유용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문사회학을 위해서는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우는 인문사회학을 압축된 근대 시민 교육 에센스로 구성해야한다. 이미 수능과 논술은 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등교육 지식체계를 선행하는 구조로 굳어졌다. 그리고 고교교육 내의 인문사회학 분과(국어, 탐구, 논술)는 이미 컨텐츠적인 부분에서 상당부분 ‘근대’를 중심으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인지하는 공교육/사교육 종사자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역사분과, 그 중에서도 특히 세계사를 제외하고는 근대라는 개념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컨텐츠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중등교육 과정을 논하면서 사교육까지 포함하는 이유는, 인문학의 긴 역사 중 가정교육과 사교육이 차지하는 지분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의 인문학을 옹호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논리인 ‘인성교육’이나 ‘전인교육’ 등은, 사실 국가에 부속된 교육기관이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근대의 개념이 없는 현재의 부모세대가 자녀에게 근대적 시민교육을 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의 사교육은 공교육과 실질적으로 같은, 혹은 더 나은 기능을 수행한다. 인강을 비롯한 다양한 플랫폼을 덕분이다. 그러므로 우선 중등교육과정에서 ‘근대시민교육 혁명’이 가장 급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중등교육과정에서 후근대 혹은 현대의 기본적인 에센스까지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니체가 어떻게 말했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뭐고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량적 사고, 실증적 사고, 이성적 사고 위에 후근대성까지 인지하는 인간형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고등교육 과정인 대학과 대학원은 인문학 전공자의 수를 대폭 축소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극소수의 연구자(상위 2% 내외), 소수의 교육자(상위 10%내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인문학을 기초교양으로 수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인문사회학은 근대적, 후근대적 사고를 중심으로 재편된 필수교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산업지형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기술교육이 이원체제로 수반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연구자와 교육자의 분리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인문사회학이 모든 학부의 필수교양이 된다면, 인문사회학 연구자와 교육자 수요는 유지될 것이다. 그러므로 극소수의 연구자를 길러내는 특수대학 혹은 특수대학원 과정이 신설되어야 한다. 교육부에서는 학파와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국립대에 인문학부를 남기고, 사립대끼리 유치경쟁을 해야한다. 마치 로스쿨이나 의대처럼 말이다. 물론 인문학은 법이나 의학과 달리 유치경쟁이 일어나긴 어렵겠지만, 유치에 성공할 시 다양한 혜택을 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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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며,

 

근대의 위계가 서구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이미 100년 전의 개화기 지식인들도 고민하던 사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물질적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이미 근대 위계의 정점 근처로 꽤나 올라온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글로벌 인재를 길러야 한다. 뭐 이런 얘기들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시민’을 넘어 후근대 사회에 적합한 ‘세계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근대시민 멘탈리티부터 교육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해서 이야기하자면, 미국소재 명문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외국인 친구들은 이미 근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해외 명문대 출신인 외국인 친구들은 내게 ‘근대는 일방향적 사고라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근대적 사고의 문제점을 모르는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묘하게 씁쓸한 기분 때문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반면 국내에서 근대에 대해 얘기해봤자 돌아오는건 ‘이게 무슨 듣도보도 못한 소리?’ 같은 반응밖에 없었다. 경제규모야 서구권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 되었지만, ‘시민교양’ 교육은 아직도 ‘근대지향사회’와 ‘후근대사회’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좁힐 ‘인문학’의 재탄생. 탈진영 세대가 안된다면, 그 다음 세대라도 필요한 일이다.

 

원글 : http://www.disslike.net/archives/660

커버 사본

흙수저는 안되지만, ‘금두뇌’는 괜찮다?

얼마 전 지인과 대화하다 ‘페북에 논란이 일 걸 알면서 굳이 특정 주제에 대한 글을 쓸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ㅍㅍㅅㅅ이나 직썰같은데서 가져가는 내 글은 대부분 자기계발이나 관계에 대한 글인데, 이처럼 논란이 되지 않을만한 글만 쓰는 게 어떠냐는 말이었다.

 

물론 종종 댓글이나 다른 의견에 힘들어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좋은 의미에서 조언을 해 준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내가 민감한 주제에 대해 논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좀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뉴스의 헤드라인을 보고 흐뭇해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그리고 나는 조금은 그 뉴스의 뒷면, 옆면을 바라보고 싶을 때가 많다. 이 뉴스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보고 싶은 기사이다. 그러니 그냥 내가 쓰고 싶어서, 한번 써 본다.

 

김해영

자, 여기 20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시 연제구에서 당선된 분이 계시다. 어려서부터 고모님 밑에서 힘들게 생활하였고, 아버지도 암투병을 하시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상대 후보는 여가부 장관을 지낸 2선 의원이라 상대적으로 힘든 선거를 치뤘다.

 

하지만 그는 승리하였고, 각종 언론에서는 그를 흙수저 신화라 부른다. 평소 흙수저 담론을 싫어하는 나는 이 기사가 처음부터 불편했다. 헌데 기사를 보다 보니, 이 분은 고2때 43명 중에 42등을 할만큼 공부를 못했는데, 95년 50일 벼락치기로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흙수저는 맞다 쳐도 이쯤 되면 ‘금두뇌’다.

 

조금은 불편한 사실을 하나 떠올려보자. 우리는 보통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업을 얻는 것에는 정의롭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공부를 못하고 적당한 직장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혀를 끌끌 차곤 한다.

 

당연하다 생각될지 모르는 이러한 담론에는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노력의 산물’이라는 논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를 수 있는, 어쩌면 사실을 교묘하게 가려버리는 논리이다.

 

미시간 주립대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노력이 미치는 영향은 게임이 26%, 음악이 21%, 스포츠는 18%로 나타났습니다. 흥미로운 건 공부인데요, 노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4%. 결국 선천적 재능이 훨씬 중요하다고 합니다. 환경이나 나이 역시 중요한 요소라고 꼽았는데요. 이 결과 때문에 혹시 노력하는 사람이 줄어들지는 않겠죠?”(출처 : www.huffingtonpost.kr/2014/07/17/story_n_5594184.html)

 

개인적으로 4%까지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공부는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즉 두뇌의 영향이 엄청나게 많이 미친다. 예전 군대가기 전 휴학하고 초등학생 학원 수학강사를 한 적이 있는데, 정말 구구단을 한 번만 알려줘도 단번에 암기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며칠동안 갖은 유혹과 협박(?)을 동원해 알려줘도 모르는 애들이 있다. 공부에도 애초부터 출발선이 다르다.

 

김해영 당선자님이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올곧게 자라 박수 받을 만한 사람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꼴지하다 50일 공부해서 부산대 법대를 갈 만큼, 그리고 아버지 병수발 들면서 사법고시에 합격할 만큼 ‘금두뇌’를 가진 분으로 예상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시작의 평등을 강조하며 흙수저 담론을 들먹이지만, 이러한 분들은 시작부터 기가 막히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즉, 굳이 이를 두고 흙수저의 성공이라고 자축하거나, 정의가 승리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괴짜경제학

ⓒ 괴짜경제학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스티븐레빗이 쓴 <괴짜경제학>엔 하버드로 가는 두 갈래 길의 케이스가 등장한다. 부모의 사랑과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어느 백인 아이. 그리고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다 십대 때 폭력조직에 개입한 어느 흑인 아이. 어느 쪽이 더 ‘성공’ 했을까?

 

백인 아이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테드 카진스키’로 17년 동안 폭탄테러로 온 미국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반면 흑인 아이는 ‘롤랜드 G 프라이어 주니어’로 하버드대학의 경제학자가 되어 ‘흑인들의 낮은 성취도’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같은 환경이라도 누구에게는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다른 누구에게는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환경에만 집중하여 흙수저 담론에만 집착한다면 나의 잘못된 점을 모두 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있다. 부모의 탓, 사회의 탓. 하지만 그것이 해답은 아니다. 비록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특성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이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운 분들이 지독히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서울대를 나오신 분들이다. 대략 60년대 전후에 태어나신 분들이 그런 분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 MB를 생각하면 된다.

 

이명박

 

“내가 다 해봤는데 돼. 너는 왜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다고 그러냐.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노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 시대가 다를 수도 있고, 두뇌가 다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은 능력을 갖고 있고, 노력하면 다 잘 할 수 있다는 것은 산업화 시대가 낳은 신념일 뿐이다. 사실이 아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다는 말이다.

 

괜히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여 국회의원까지 된 분을 까는 듯하게 들렸다면 미안하다. 내가 불편한 부분은 이 분의 당선이 아니라, 이 기사에서 보여준 ‘흙수저 담론’이다.

 

“진박 제친 ‘흙수저 변호사’.. “기회 평등 사다리 잇겠다”

 

흙수저 변호사, 이건 그냥 형용모순이다. 둥근 정사각형, 침묵의 소리,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랑 같다는 말이다.

세월호 커버

나는 분노한다.

ⓒ 국민일보

ⓒ 국민일보

2년 전 세월호가 침몰했다. 침몰하는 배안에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학생들과 관광객, 운송업을 하는 자영업자들이 타고 있었다. 침몰하는 배안에서 스스로 살 길을 찾은 사람들을 제외하고, 선장의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에 말없이 순종했던 착한 사람들은 세월호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우리는,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들이 무력하게 목숨을 잃어가는 장면을 생중계로 지켜봤다.

 

바다에 가라앉으면 산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저체온증으로 인해 3시간안에 사망한다는 뉴스가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 뉴스를 보면서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우리였다. 제발 살아있어달라고,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 말아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간절하게 바랐음에도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굴조차 모르는 아이들이었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다. 티비를 틀면 세월호 관련 소식들이 쏟아졌고, 세월호가 침몰할 수 밖에 없었던 많은 이유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redian

ⓒredian

 

청해진해운을 실질적으로 소유하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유병언의 온갖 비리, 선장 이준석의 무책임한 행동, 지역사회의 관행, 그것을 방치한 국가의 낙후된 시스템, 그리고 감시기능의 부재가 총체적으로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어찌된 일인지, 세월호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이지만, 무고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에게 미안함이 계속 몰려왔다. 일상의 업무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의 무기력함이 지속됐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우울증과 비슷한 상태였던 것 같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세월호와 함께 잠긴 이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아마도 세월호 참사가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단면을 내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 자신의 맡은 바를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사람, 공정함을 대신하는 온갖 연줄, 이를 방지하지 못하는 제도, 그리고 그 제도를 감시하지 못하는 우리. 세월호 참사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부정적 단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민중의소리

ⓒ민중의소리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일까? 세월호를 떠올리면 안타까움 말고 하나의 감정이 더 생긴다. 바로 세월호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을 향한 혐오와 분노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여러 쟁점이 있다는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을 세월호와 관련하여 이미 규명된 ‘과학적 진실’을 의도적으로 부정한다. 그리고 ‘과학적 진실’의 자리에 자신들의 음모론을 집어넣는다. 과학적 진실을 대신하는 음모론의 뒤에 자신들의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이후 이와 관련된 많은 ‘시장’이 생겨났다. 이미 조사가 끝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이 처벌까지 받은 상황에서, 커져버린 정치판의 뒷수습을 위한 특조위가 생겼다. 그러나 특조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또한 세월호와 관련된 수 많은 단체들이 생겼으며 관련된 상품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수 많은 ‘시장’들이 돌아가기 위해 국민들의 세금은 물론이고,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성금이 투입되었다. 이 시장으로 인해 누군가는 정치적 이익을, 누군가는 금전적 이익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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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물론 이러한 ‘만들어진 분노’에 동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이익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를 생산하고, 설파하는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수십년간 증명되어온 ‘분노 시장’의 블루오션에 불과한 것 같았다. ‘잊지 않겠다’는 구호도, ‘침묵하지 않겠다’는 말도 오랜 기간 이 ‘시장’을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처럼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세월호 참사에 분노한다는 사람들이 ‘세월호처럼 침몰했다’라는 표현을 쓰거나,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본딴 만평을 그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분노하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도 세월호의 분노를 주도했던 이들은, ‘분노 시장’이 생산될 수 있는 곳이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명예를 얻고 돈을 만들었다.

 

이들의 무리한 장사가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퇴색시킨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더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지만, 없앨 수 없는 분향소만이 쓸쓸하게 남아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세월호를 팔아먹던 장사꾼들은 어느새 세월호를 이야기 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잊지 않겠다’고 부르짖던 유가족들은 슬픔에 잠겨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팽목항과 안산의 주민들의 피해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오늘은 세월호 2주기다. ‘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져 불과 며칠 전까지 아무도 관심갖지 않다가, 기념일마냥 갑자기 ‘기억’해주는 존재가 되어버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2년이 지난 날이다. 이제는 만들어진 분노와 강요된 기억을 잊고, 세월호 참사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를 하나씩 풀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무고하게 죽어간 아이들과 어른들, 구조를 하다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세월호를 제대로 기억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맡은 직무안에서 윤리의식을 가진다면.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상황속에서도 원칙과 메뉴얼을 준수하며 시스템안의 부조리와 부패에 있어 투철한 신고의식을 가진다면. 빨리빨리, 좋은게 좋은거지라는 문화가 쌓여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적폐들을 하나씩 없앤다면.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운 죽음이 헛되이 되지 않았다고 매년 4월 16일이면 당당히 말할 수 있기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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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죽이는 완벽한 방법-삼성신도시 잔혹사

부동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아마 평택이 꽤 핫하다는 얘기를 들었을거다. 지금 평택에는 40조 원 규모의 삼성단지, 신도시가 착공된 상태다. 정확히는 삼성만 40조 원에 LG, 하이닉스까지 입주가 예정되어 있으니 기존 평택 도심보다 큰 새로운 도시가 아예 새로 만들어지는 중이다. 그런데 이 공사가 지금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이미 몇차례 한국경제신문 보도가 있었지만 현재도 상황은 똑같다. 지역 건설업 종사자들과  지역신문을 통해 파악된 내용에 따르면,  가장 큰 문제는 전력문제다. 대규모 반도체 공장에 안정적 전기공급은 필수요건이다. 착공 당시 계획은 당진발전소와 서안성 변전소에서 각각 전기를 끌어올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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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그러나 현재 당진시와 안성시가 송전을 거부한 상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여러 주장을 한다. 그러나 지난 평택호 매립지 판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이건 무슨 소리인가? 평택과 당진은 서해대교가 가로지르는 큰 물길로 나뉘어 있는데 이곳은 양 시의 경계다. 그런데 평택항 옆에 대규모 매립지를 만들었고 이 매립지가 행정구역상 당진시의 경계를 넘어간다. 당진시는 당연히 자기들 땅이라는 주장이고, 평택시는 그렇게 되면 행정구역상 섬이되고 평택항에 접해있으니 당연히 평택관할이라는 주장. 결국 소송까지 갔고, 법원은 평택시의 손을 들어줬다.

그랬더니 당진시의 반격이 바로 북당진변환소 건설허가 반려다. 거기에 뜬금없이 안성시까지 송전탑 건설을 막고나섰다. ‘너희 동네 전기를 왜 우리가 보내주냐’는 몽니로 밖에 볼 수 없다. 한전과 정부, 경기도까지 나서서 조율을 하려하지만 여전히 전력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다. 여기에 갈등산업 종사자들인 ~~연대 같은 분들이 송전선OUT을 외치며 끼어들어 문제가 더 꼬여가는 상태. 40조 원 규모의 반도체 공장단지에 쓸 전기가 없는 상태다. 손바닥 만한 땅에 동네별로 발전소도 지어야 되는 모양이다. 다른 문제는 역시나 건수 잡히면 없으면 섭한 ‘~~살리기단체’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요구는  △지역 내 건설기계·자재·장비·인력·식자재 100% 사용 △평택인력협의회를 통한 지역 인력 고용 △삼성의 장비 안전관리 기준 완화 △자유로운 현장출입을 위한 프리패스 출입증 발급 등의 수용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억지를 굳이 지면을 할애하여 욕말고 비판이란걸 해줘야할지 모르겠다. 정상적으로 사업을 영위한 사람들은 이런 떼쓰기 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가? 평택에서 사업을 하는 이들이 가장 꺼리는 파트너가 바로 미군과 삼성이다. 가장 깐깐하고 절차에 예외가 없다. 이들에게 납품하는 사람들은 최고들만 납품 할수있고 절차도 매우 복잡하다. 지금까지 평택서 사업을 하면서 미군한테도 납품 한번 못해본 이류,삼류들의 모임이 몽니를 부리며 나선 것이다. 당연히 본업에 충실했던 일류들은 저런 떼쓰기 관심도 없다

그런 자들이 자기한테도 일감 내놓으라고 공사장,시청 앞에서 꾕과리 울리며 강짜를 놓고있다. 40조 원 규모의 공사를 평택시에서만 조달하고 평택사람만 써라?  아마 평택시 모든 물자를 긁어모아도 못할 것이다.  사업장 프리패스? 무슨 반도체 공장을 동네 컨테이너 창고 짓는줄 아나.

이 꼴을 보고 있으니 대기업들이 우리나라에 공장을 지으려하면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꼴이면 차라리 사업철수하고 베트남으로 가는 게 좋을것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별에별 부자 베껴먹기 경연대회가 이어질까. 이런 상황은 이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케아를 유치하기 위해 갖은 혜택을 제시하던 광명시가 이케아 개장 이후에 강제휴무부과 법안을 추진하고 임시사용승인을 취소 할 수 있다는 압박을 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느 기업이 정부와 지자체를 믿고 투자를 할수있단 말인가?

각 지역에 대기업이 공장, 점포를 내려하면 지자체, 시의회, 시민단체가 나서서 수많은 계산서를 들이밀고 텃세를 부리는게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서비스업이 어떻다해도 지방이 사는 방법은 공장이 많아지는 수밖에 없다. 평택도 쌍용차, 기아, 만도로 먹고살고 거제, 울산 같은 도시도 마찬가지다. 공장이 중산층을 만든다. 매연이 아름다운 도시 평택이 그나마 살만한건 수많은 공장 덕이다.

이런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괴롭히고 기어코 배를 가르려하는 저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니 정말 나라가 망조가 들은게 아닌가하는 깊은 절망까지 생긴다. 이런게 바로 상생인가? 이런 소식을 접하면 절망감과 무기력감에 빠진다. 다시 대한민국은 도시마다, 동네마다 찢어져서 문닫고 텃세부리며 살던 조선시대로 돌아가고 있는가? 우린 왜 이렇게 일그러져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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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국민들은 진짜 열광했을까?

 

ⓒ KBS

ⓒ KBS

 

이른바 진보세력이 주장하는 ‘열광’의 정의에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위 기사에 따르면 필리버스터로 온국민이 열광했다는데 주위를 둘러보면 딱히 그래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어느 내집단에 속해 있길래 혁명전야와 같은 ‘열광’을 목격하고 장중한 칼럼을 써 내려갔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국민적 열광’의 객관적 지표는 늘 그런대로 트위터의 RT숫자라든가 페이스북 공유, 좋아요 숫자로 파악하는 것 같다. 그런데 SNS에서 특정 진영에 환호하는 현상은 문재인이나 표창원, 박원순 트위터만 들어가도 365일 벌어지던 ‘국민적 열광’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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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SNS가 아닌, 진짜 지표를 보자.

리얼미터가 제공한 정당지지도다. 필리버스터 바로 직전(22일)의 정당지지율은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 42.1
[더불어민주당] 24.3
[국민의당] 13.9

은수미의 필리버스터가 끝나고 그 팬덤 효과가 극에 달했던 26일의 정당지지율은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 46.5
[더불어민주당] 26.8
[국민의당] 11.0

새누리당은 오히려 큰 폭으로 상승했고, 더불어민주당도 상승했지만 국민의당이 하락했다.

29일에 새누리당은 4%포인트가 하락한 42.6%이나 필리버스터가 끝난지 단 하루만(3일)에 46.1%로 회복했다. 이는 오히려 2월 1주 40.2보다 6%포인트나 높아진 수치다.

마지막 자료인 4일 정당지지도는 다음과 같다.

[새누리당] 43.1
[더불어민주당] 26.7
[국민의당] 11.8

뭐가 국민적 열광이란 말인가? 국민의당 지지율과 무당층 지지율을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사이좋게 나눠가진 것밖에 더 있나? 심지어 새누리당이 좀 더 많이 혜택을 입었다.

 

필리버스터 전후를 비교해봤을 때 국민적 열광이라고 부르기에 걸맞지 않는 평범한 지지율 변화다.  멀리는 효순이미선이(SOFA개정), 광우병, 4대강, 미디어악법, 도룡뇽살리기부터 세월호, 노동개악, 복면 폭력 총파업, 필리버스터까지 뭐하나 국민적 열광이 아니었던적이 없었다. 매년 매달 매일 일어나는 ‘우리들만의 열광’에 무슨 분석이 있고 책임론이 있나?

 

민주당 지지자들의 자기 기만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된다. 정의가 불타오르던 80년대부터 지금까지 쉬지도 않는다. 필리버스터는 그저 국민의당의 존재감을 말소시킨 것 외에 다른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것도 김종인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선거구 획정도 못하고 침묵하는 다수가 심판하는 여론의 뭇매를 맞은 다음 ‘나라 팔아먹어도 지지해주는 사람이 있다’며 정의감을 뽐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이번 총선도 멋있게 패배하는 민주당의 모습을 보았겠지. 패배DNA는 특별한 게 아니다. 객관적이라고 자부하면서 정작 객관적인 지표나 통계가 아니라 주관적인 측정, 즉 자기 지지자들 내부의 정서나 반응을 중요시 여기며 자위하는 것에 그칠 때.

 

냉정한 현실 인식을 하지 못할 때, 문제를 모르니 답을 알 수 없는 악순환에 빠져 계속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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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게임 규제를 규탄한다!

모든 규제는 일종의 시장왜곡이다.  자연상태를 인위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각 주체의 인센티브를 잘 고려해서 설계해야 한다. 너무 심하게 왜곡하면 각 주체의 인센티브를 파괴해서 시장 자체가 터질 수도 있고, 제대로 건드리지 못하면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2월 25일에 발표된 게임중독의 질병코드화 및 추후관리는 78회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발표됐다. 그 중 보건복지부의 ‘정신건강 종합대책(2016~2020년)’ 문서에 관련됐다. 게임중독을 당장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건 아니지만,장기적으로 정신건강관리 측면에서 질병처럼 관리하겠다는 이야기다. 돌려서 말하는 것이지 같은 이야기다. 게임중독의 질병코드화가 직접적인 시장규제는 아니지만, 게임을 중독물질로 규정하고 업체들을 압박하는 게 게임업계의 인센티브를 떨어뜨리는 간접적인 규제로 볼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내보낸 보도자료에 따르면 앞으로 청소년의 게임중독을 관리하기 위해 초-중-고등학교에서 인터넷게임, 스마트폰 등에 대한 중독선별검사를 실시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근거가 뭔지 아는가? 2011년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서 국민 100명 중 6명이 알코올-인터넷-도박-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는 점. 이게 근거다.

진짜다. 보도자료에 이거밖에 없다.

 

알콜과 도박은 성인만 접근가능하다. 마약은 의료용을 제외하면 사용 자체가 불법이다. 이런 것들과 다르게 게임은 심의를 거쳐서 등급을 매기고, 등급에 따라 접근권한도 달라진다. 그러니까 게임을 특정연령 이하는 섭취할 수 없는 물질, 할 수 없는 행동 및 불법 물질과 동일선상에 놓는 일은 참 문제적인 행동인데, 그 문제적인 행동의 근거가 너무나 미약하다.

 

게임 중독이 무엇인지 정의내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게임 중독과 인터넷 중독을 구분하지도 않은 조사를 근거로 쓰는 게 무슨 상황인가. 오히려 게임콘텐츠진흥원이 실시한 ‘2015 게임과몰입 종합 실태조사’ 에 따르면, 2015년 기준 게임과몰입군은 전체의 0.7%다. 표본도 다르고, 조사 방법도 다르겠지만 이 조사를 보면 숫자가 참 적다.

 

여기서 또 하나. 사실 게임 중독이라는 질병이 정확히 규정되지 않았다. 기사를 뒤져보니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같은 경우 addiction이 아니라 disorder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추후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 외의 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는다. 기사를 좀 더 찾아보니 한국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이런 시점에서 제대로 규정되지도 않은 게임중독이란 가상의 적을 왜 이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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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신문

 

질병으로 관리하는 순간, 손인춘 법에서 주장한 “매출액의 몇 %를 기금으로 뜯는 행위”가 정당해진다.  새누리당 손인춘 의원이 발의한 게임 규제 법안에서는 ‘인터넷게임중독치유센터’를 설립하고, 이를 여성부 장관이 관리하며 관련 업계의 매출 1%를 인터넷게임중독치유부담금으로 징수하겠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정신의학과를 포함한 여러 기관에서 게임중독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생긴다.

참고로 게임중독법을 이끈 사람은 신의진 의원인데, 본업이 정신과 의사다. 신의진 법은 더 악법이다. ‘게임’을 넘어서 ‘인터넷 콘텐츠’라는 정체 모를 무언가를 규제하자고 한다. 이래서 정말 헬조선이다.

 

 

ⓒ 동아일보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의 이해관계는 게임을 질병으로 관리하고 규제할수록 손발이 착착 맞는다.반대로 문체부와 미래부는 이럴수록 복장이 터진다. 한류라고 외치면서 강남스타일을 주문처럼 외울 때 번 돈보다 서든어택 총알로 더 많은 돈을 벌었다. 2014년 기준으로 콘텐츠산업 수출액이 약 50억 달러인데, 이 중 절반 이상이 게임에서 나왔다. 케이팝이랑 드라마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게임이 수출왕이다.

 

게임 중독이 질병으로 정의되진 않았지만 게임으로 인한 문제 역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미디어를 어떻게 사용해야할지, 미디어 리터러시가 낮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도구가 있으면 그 도구를 어떻게 써야 잘 쓴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하는 게  먼저다. 무조건 그 도구를 못 쓰게 규제하는 게 전부가 아니다.

또한 중독 같은 경우, ‘단절’이 전제되는 상황에 일어난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회와 단절되어 있을 때 게임이 툭 떨어지면 그 사람은 소위 ‘중독자’ 상태가 되는 셈이다. 그 자리에 술이 있으면 알코올중독, 도박이 들어가면 도박중독이 된다. 이에따라 미시적인 정책도 있어야겠다만 장기적으론 사회에서 단절된 사람을 어떻게 데려올지 고민해야 하는데 한국의 규제 정책은 그런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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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DUCHINA

 

 

앞서 말했다시피 결국 규제는 각 주체의 인센티브를 조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토록 빈약한 근거로 엄청난 규제를 예고하는 게임중독 질병코드화는 아무리 봐도 정부 관련부처만 좋고 산업을 죽이는 일이다. 각 주체의 인센티브를 적당히 갖고 노는 게 아니라 일단 규제로 두들기고, 두들길 때 나오는 콩고물을 정부가 관리하려는 것이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싸이 이야기보다 페이커 이야기를 듣는 세상이다.

한국 게임 콘텐츠가 전세계로 팔리는 세상에 게임을 이렇게 무식하게 규제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과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뱃지를 달고 있다.  무차별 시장파괴 살인전차가 따로 없다. 후져도 너무 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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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차별,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비명문대생의 비명>

 

입시라는 전쟁이 끝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요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그간의 노고에 따른 성취감을 한껏 만끽하고 있지만, 누군가의 성공은 곧 누군가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원인을 타자로부터 찾는 이들의 불평불만은 항상 승자들의 기쁨과 동행한다.

 

 

최근에 일었던 ‘합격자 현수막’ 논란은 그 일례라고 보여진다. 특정학교 합격 현수막을 게시하는 관행이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며,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아예 대학교 진학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도 이에 대한 성명을 낸 적이 있다.

 

 

하지만 노력한 이들의 성취는 도외시하고, 다른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우선시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온정에서 기인한 행동들은 언제나 정의로워 보이지만, 늘 그렇듯이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진정성도 효용성도 없다.

 

 

오히려 뜻이 있어 대학교에 가지 않은 이들과 비(非)명문대생들의 목소리를 모두 비명으로 치부하는 일부 사람들의 독선이 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학벌주의라는 편견>

 
편견에 관한 에드먼드 버크의 설명만큼 학벌주의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버크는 편견이 우리를 현명한 행동으로 향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편견 자체가 무엇이 현명한 행동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편견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옹호하는데, 여기서 이성이란 편견이 지닌 본유적 가치나 통찰이 아니라 사회적 효율성을 함의한다.

 

나는 학벌주의가 이 편견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본다. 확연히 드러나는 정량적 평가요소가 동일하다면, 차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학벌인 것이다.

 

학벌 자체가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효율적인 지표라는 뜻이다. 그리고 단순히 학교 간판만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학벌이라는 결과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이미 그들 대부분은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실력도 없으면서 학벌 만능주의를 믿고 오만하게 구는 사람들은 어차피 도태되기 마련이며, 마찬가지로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학벌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언가 잘 안 풀린다면, 그것은 학벌의 문제이기 이전에 실력의 문제일 확률이 높다.

 

 

<학벌주의의 역차별>

 
부산교육대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1,417명은 “수도권 지역 초등교사 시험에서 같은 지역 교육대학교 출신에게만 가산점을 주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지방교대에 다니는 이들이 수도권에서 초등교사가 되는 데에 불이익을 겪으므로 공무담임권이 침해 된다는 것이 주요 논거였다.

 

우스운 사실은 그런 정책을 이미 다 알고 지방 소재의 교대에 입학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야 본인들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느냐는 점이다. 해가 지나면서 갑자기 권리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당시에 없던 제도를 신설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불평등하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를 합헌이라 결정했다. (2010헌마747) 그런데 혹자는 이걸 가지고 ‘교대 서열화’ 혹은 ‘지방 교대 차별’이라는 올가미를 걸어 학벌주의와 연동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흔히 말하는 약자 코스프레를 통한 역차별을 경계해야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서울대 폐지론>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를 가장 싫어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를 택하겠다. 그의 저서 ‘서울대의 나라’를 보면 “서울대는 학생 수를 지금의 2분의 1 규모로 과감하게 자기축소를 해야 한다”는 텍스트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대를 포함한 주요 국립대들 사이에 상호 보완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학사과정에 한시적으로 서울대 명칭의 입학생과 졸업생을 내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서울대생이 아니어서 필요 이상의 증오심이 솟구치지는 않았다. ‘대학개혁’이라는 명목 하에 실질적인 서울대 폐지론은 노무현 정부 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여론 반발에 의해 이내 묻혔지만, 이러한 대학개혁론은 지난 18대 대선 당시 민주당의 당론으로서 손학규 전 대표가 강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대를 폐지하면 학벌주의가 완화될까? 국립대를 제외한 명문사립대들을 중심으로 학벌주의가 재편될 뿐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서울대 정원을 축소하면 서울대의 위상이 줄어들까? 더욱 높아진 서울대의 문턱은 서울대의 위상을 한 층 더 끌어올릴 것이다.

 

지방은 식민지라고? 지방 소재 의대, POSTECH, KAIST, UNIST,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와 같은 학교들은 왜 이럴 때만 없는 취급하는지 궁금하다. 명문대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학벌주의의 폐단이 아니다.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할 학생임에도 대졸이라는 학벌을 얻기 위해 4년의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것, 또 그들의 학벌주의에 기생하여 등록금만 납부하면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너무 많다는 것이 진짜 폐단이다.

 

 

<협업 ⊂ 경쟁>

 

전 세계를 통틀어 유례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은 대한민국의 고속성장은 높은 성취 열망을 지닌 고급 인적자원들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 때문인지 우리나라는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마그마급 교육열은 전세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든 성공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 교육이라는 증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당사자인 한국 사회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며 학력위조를 비롯한 온갖 범죄까지 학벌주의의 폐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한국의 모든 문제가 명문대와 명문대 졸업생들의 잘못이라고 탓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경쟁이 아닌 협업을 장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의미의 협업 따위는 없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협업은 결국 효과적인 경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같은 반 친구들끼리의 경쟁은 나쁜 경쟁이고, 다른 학교와의 경쟁은 착한 경쟁이라 말하는 그 무지몽매함은 우습다 못해 애처롭다.

 

협업을 통한 경쟁이 있을 뿐, 경쟁 없는 협업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 노력, 동일 성취>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외치는 사람들은 왜 동일 노력, 동일 성취는 외치지 않는 것일까? 본인 보다 앞에서 시작하는 이들을 향한 비난은 존재하되, 왜 저들이 나보다 앞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재수강이나 겨우 면해가며 어영부영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더라.

 

현대판 신분제도, 명문대생들의 사회 요직 집중화 현상, 진학 경쟁 심화와 낙오자 양산 등이 학벌주의의 문제로 꼽히지만, 명문대라서 뽑는 것이 아니라 뽑아 놓고 보니 명문대라는 인사 담당자들의 말이 더 일리 있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반대 사례로서 학벌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이들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나는 학벌을 신분으로 보지 않는다. 그만큼 학벌만 좋은 낙오자들도 숱하게 많이 봐왔다. 물론 변명이 습관이 된 이들은 납득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나보다 높게 평가되는 모든 기준을 거부하지만, 정작 자신이 남보다 앞선 부분은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명문대에 가지 못했어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는 없다. 그들이 그곳에 이르기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갈음하는 무언가를 나도 똑같이 투자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딱히 후회도 없다. 내 인생에는 그들이 겪지 못했던 재미와 경험들이 많았으니까.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적어도 그들이 행한 노력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은 ‘카르페디엠’을 외치고 다니던 과거의 내가 졌던 채무이자, 학벌이 내리는 벌(罰)이라고 생각하련다. 벌 좀 선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도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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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규제가 답이 아니다.

한국 영화 시장은 크다.  나라 크기에 비하면 큰 게 아니라 그냥 크다. <인턴>은 매출 천만 불이 넘는 해외국가가 한국과 일본뿐이다. 일본 매출액은 1400만 달러 규모고, 한국 매출액은 일본의 2배 가량인 2410만 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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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

 

규모가 작은 영화였고 적극적으로 해외마케팅도 안했는데 이정도나 팔렸다. <인턴>이 특별한 케이스인 것도 아니다. 영국제작사 ‘워킹타이틀’이 제작한 <어바웃타임>은 영국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가장 높은 매출액을 기록했다.

 

<인터스텔라>의 해외 매출액 14%가 한국에서 나왔다. 약 6900만 달러로 1위 중국의 1억 2200만 달러에 이은 2위다. 참고로 3위는 영국이었다.

 

영국뽕 맞는 영화, 킹스맨 역시 정작 영국보다 한국에서 더 잘 팔렸다. 매출액이 영국의 2배 규모(한국이 4700만 달러, 영국이 2400만 달러)였다.

 

명량보다 제작비가 많이 든(약 260억 원) 작품인데 ‘다양성영화’로 분류가 된 <비긴어게인>도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갔다. 이처럼 꽤 많은 해외 영화들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 한국에서 많은 매출을 기록한다. 헐리우드의 관점에서 바라봐도 한국은 커다란 영화 시장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한 잭 블랙이 “한국 영화 시장은 크고 중요하다.”고 말한 게 립 서비스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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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데일리

 

 

중국은 해외 영화를 선별적으로 개봉하고, 일본은 신작을 늦게 개봉하며 이상한 애니메이션이 뜬금 없이 차트 상위를 차지한다.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할리우드에게 가장 매력적인 아시아 시장은 한국이다. 실제로 동아시아 매출 중 한국 시장이 중국에 이은 2위인 경우가 많다.

 

중국이 어느 분야든 압도적인 걸 감안하면 한국의 영화시장은 기형적으로 크다. 괜히 톰아저씨가 방한하는 게 아니고, 데드풀이 설날 마케팅을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은 영화를 왜 이렇게 많이 보는 것일까. 쉽게 말해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단순히 ‘싸다’고 말할 게 아니다. 1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할리우드 배우들이 나오는, 세계 S급 콘텐츠를 볼 수 있는 경로가 영화말고 더 있나?

 

2시간가량 투자해서 세계구급 콘텐츠를 향유할 수 있는 경로는 영화뿐이다. 결정적으로 지역과 상관 없이 어디서나 편하게 볼 수 있다. 지역과 서울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문화콘텐츠에 있다. 고퀄리티의 공연/뮤지컬/연극 등의 콘텐츠가 대부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CGV는 전국 각지에 없는 곳이 거의 없다. 곳곳에 깔려 있으니까 접근성도 좋고, 콘텐츠 지불가격도 퀄리티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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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외전 포스터

 

이제 최근 한국영화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한 <검사외전>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 설날 연휴 중 스크린의 75%가량을 검사외전이 차지했다.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이라고? 배급은 쇼박스다. 단순히 ‘대기업 수직계열화로 인한 독과점’이라 말하기엔 어폐가 있다. <검사외전>이 이렇게 스크린을 많이 가져간 데에는 이 외의 여러 요소가 들어있다.

 

1) 전년 동기에 비해 관객수가 20%가량 줄었다. 올해 1월 총 관객수가 1700만 명가량. 작년 1월은 2300만 명. 약 25%가량 줄었다.

2) 경쟁작들이 망했다. 오빠생각, 로봇소리 다 망작으로 평가받고, 캐롤은 설날 연휴용 콘텐츠가 아니다. 작품성이 좋다고 해서 극장이 틀어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심지어 설날 연휴라는 대목에.

3) 나름 잘만들었다. 뻔한 문법의 영화지만 볼만한 영화다.

 

한국영화가 흥행만 하면 나오는 이야기가 대기업 독과점 때문이라는 소리다. 그런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말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규제로 영화 시장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하는가? 내가 극장주인이면 매년 대목에 관객 텅텅 비는 <로봇,소리> 같은 영화를 틀고 있으면 눈물날 것 같다. 영화를 거는 극장도 시장의 플레이어다. 안 되는 작품을 억지로 걸어야 할 의무를 가진 자선사업자가 아니다.

 

<검사외전>의 높은 좌석점유율은 배급 이전에 쉽고 재밌는 대중 영화를 찾는 관객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연휴 시즌에는 가벼운 영화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가. 자, 그럼 저예산독립 혹은 다양성영화는 가만히 있어야 할까?

 

시장 논리에 의해 어쩔 수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 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영화 배급사와 투자사가 스크린 숫자에 애걸복걸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극장 매출이 영화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2014년 기준 한국 영화산업 매출이 1조 6천억가량인데, 이중 80%가 극장매출이다. 다른 나라 같은 경우 50~60%가량을 차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미국과 한국은 영화콘텐츠를 소비하는 경로가 다르다. 그래도 넷플릭스가 세계 영상 시장의 패권을 차지하려드는 것을 보면 한국영화계도 2차 시장(극장이 아닌 다른 경로)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어쨌거나 온라인 VOD시장은 스멀스멀 커지고, DVD-블루레이 시장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저예산영화나 다양성영화의 경우 극장 시장에서 규제를 통한 인위적인 활로를 찾는 것보다는, 새롭게 확장되는 2차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편이 현명한 선택이지 않을까.

 

헤비급 선수들이 싸우는 링에 오르면서 나에게 맞는 룰을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웰터 급은 웰터의 링에서, 플라이 급은 플라이의 링에서 싸워야 한다. 멀티플렉스 시스템이 아니었던 과거에도 다양성 영화는 어려움을 겪었다. 오히려 멀티플렉스가 득세한 지금, 다양성영화가 흥행하거나 알려질 경로가 더 늘어났다.

 

<비긴 어게인>, <워낭소리>와 같은 다양성영화가 흥행하고 뉴스를 장식하는 시대는 멀티플렉스 시스템이 정착 된 지금이지 1990년대가 아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영화 시장 역시 변하고 있다. 그러한 변화가 꼭 다양성영화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수들이 음원으로 홍보를 하고, 콘서트와 굿즈로 돈을 벌려는 것처럼 다양성영화도 극장 상영을 넘어 스트리밍과 VOD 서비스 등 매니아들이 돈을 쓰는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언제까지 대기업의 횡포라는, 의미는 있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매우 낮은 슬로건으로 영화 시장의 룰을 바꿔달라고 시위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참고로 2차 시장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콘텐츠의 퀄리티는 쓰레기라 불릴 수준이다.최고 화질이 고작 720P인 경우도 많다. 오디오 품질도 낮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아직 우리 영화계가 2차 시장을 제대로 공략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다양성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예술영화관을 찾는 매니아들은 품질 좋은 스트리밍 서비스나 VOD에도 돈을 쓸 것이다. 장르를 막론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을 때 시장은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일자리 커버

공무원을 더 뽑겠다는 게 일자리 공약인가?

ⓒ 뉴시스

ⓒ 뉴시스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일자리 70만개 창출(공공부문 34만8천개+민간부문청년고용의무할당 25만2천개) 공약’에 대한 내 견해를 묻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짧게 답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공약은 한 마디로 ‘더헬조선’을 앞당기겠다는 이야기다. 가렴주구하는 공공부문의 양반들과 더불어 잘 살겠다는 뜻이다.

 

어떤 직장이든 고용 수요가 늘어나는 쪽이 있고 줄어드는 쪽이 있다. 그러니 공공부문이라고 해서 늘어나는 쪽이 왜 없겠나? 반면 사무자동화와 인구 변동으로 인해 행정서비스가 대폭 줄었거나 없어진 것도 많은데, 공공부문은 고용을 절대 안 줄인다. 이렇게 공공부문의 고용을 줄이지 못하는 문제는 한국이 가장 심할 것이다. 게다가 행정서비스도 공공부문의 고용을 늘려서 하라는 법이 없다. 민간위탁, 보조금 등 정말로 다양한 수단이 있다. 공공부문은 강하게 억제하지 않으면 점점 늘어나게 되어 있다.  기업은 이렇게 인력 늘리다가는 망한다. 그런데 공공부문은 절대 안망한다. 국민세금 으로 고용 유지하고, 임금, 연금, 복지까지 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민간을 망하게 한다.

공무원

ⓒ MBC

김대중 정부는 바보라서 공무원 총정원제 도입한 줄 아는가? 민간부문에 괜찮은 일자리가 차고도 넘쳐서 공공부문에서 10만 명 이상 잘라 낸 줄 아는가? 김대중 정부가 공무원 총정원제를 도입하고, 공공부문에서 10만 명 이상을 감축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나라가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은 정부부문(공무원)과 공공기관이 최고로 선망을 받는 직장이 됐다. 하는 일에 비해 너무 높고 안정적인 처우를 누린다.

 

나라살림연구소(소장 정창수)의 ‘2015년 서울시 자치구예산안 분석‘에 따르면 서울시 25개 자치구 공무원 29,047명의 총액 기준(세전) 인건비는 1조9701억5600만원으로, 1인당 7034만6천원이다.( 보수와 직급보조비, 성과상여금(포상금)+연금부담금까지 포함). 여기에 공무원 복지 포인트와 급량비 등을 합하면 1인당 평균 수령액은 7,437만 원이다. 출장 공무원들에게 안전행정부 지침에 따라 지급하는 월 15만~20만 원을 합치면 1인당 현금성 지원 금액은 7,700만 원에 달한다. 이 외에도 콘도와 휴양소 등 지원으로 공무원 한 명에게 배정된 예산 평균 12만9천 원이 따로 있다.

급여

ⓒ 사회디자인연구소

1인당 gdp의 2.5~ 3배 수준이다. 선진국의 공무원은 gdp의 1.5배를 넘지 않는다. 공공부문은 가장 가파른 연공임금 체계(호봉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 경직되어 있다. 놀고 먹는 자들이 그 어떤 곳 보다도 많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다. 민간기업은 그렇게 하면 망하는데, 공공부문은 안 망하기 때문이다. 공공부문은 청년인재의 블랙홀이자, 기업가 정신의 블랙홀이다. RISK(위험)는 없으면서 RETURN(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공부문의 고용임금과 복지는 우리 사회의 표준으로 기능하기에 그 파괴적 영향력이 종사자 숫자 보다 월등히 크다.

 

행정자료(주민번호, 의료보험증 번호 등)를 이용한 임금근로자 통계에 따르면 총 임금근로자 16,496천 명(통계청 통계로는 1900만 명 내외) 중 정부부부문은 215만5천개, 정부산하기관 44만5천개로 총 260만개다. 2014 안전행정통계연보에 따르면 직업 공무원 총수는 99만8,940명이다. 한국에서 취직은 어느 집안의 ‘식구’가 되는 것이기에, 공공부문은 양반집 중의 양반집으로 되어 민간 기업에 취직하는 청년들에게 모멸감을 주고, 직장 탐색기간을 늘리고, 중소기업의 인재기근난을 초래하고, 결혼과 출산 연령을 늦추는데도 큰 기여를 한다.

 

공공부문은 1987년 체제의 악성 유산이자, 1997년 개혁의 사각지대이자, 지난 20년 간의 정치적 교착 상태로 인한 최대의 수혜자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공공부문을 함부로 늘리는 걸 일자리 대책이라고 말한다. 40만 명을 잘라내면서 34만8천 명을 고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전체 인건비는 그대로 두면서 34만8천 명을 고용하면 또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막무가내로 공공부문 고용을 40만 개 가까이 늘리겠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청년고용할당제라니? 한 번 채용하면 정리해고와 징계해고 밖에 없는 나라에서, 저성과자 해고 기준 만드는 것도 반대하는 자들이, 아예 강제로 고용을 할당한다? 그래서 정년까지 책임져라? 출구를 열어두지 않고 입구만 쑤시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경기가 나빠졌을 때 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질 수 있다.

 

단언컨대 더불어민주당은 반 진보, 반 개혁, 친 양반관료, 친 헬조선 정당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개념이 없고 정신이 없는 당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사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걸어놨을 것이다. 그 정신과 방법은 어디에 두고, 사진 가지고 자신들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후예라고 사기를 치고 있다.

 

나는 과거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해 이를 갈았듯이 더불어 민주당에 대해서도 이를 간다. 더 나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영구집권 음모를 획책하니 더불어민주당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과 더불어민주당이 바로 새누리당 영구집권의 최대 공신이다. 초심이 살아 있는 자, 민주와 진보의 이름으로 새누리를 한 번 칠 때 더불어민주당을 더 강하게 쳐야 한다. 그래야 이 나라와 이 민족이 산다.

싸가지커버

싸가지 없는 원리주의자

대학에서 토론을 할 때는 회장이나 몇몇 운영진이 찬반을 임의로 배치하고 돌아가면서 토론을 한다. 단순히 내 생각을 풀어내는 입씨름이 아니라 정말 CEDA, 의회식,칼포퍼 방식 등 정식으로 토론이라는 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으로 학회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재밌는 건 원래 생각이 찬성이었던 사람이 반대 입장에서 2주 정도 토론 준비를 하면 반대 입장과 찬성 입장 사이를 기우뚱 기우뚱 하게 된다.

더 재밌는 건 30분 정도 상대와 치열하게 입씨름을 하고 나면 급격히 반대 입장으로 기울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상대에게 공격받으면서 오히려 나의 신념이 굳어지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대부분 자신의 논리가 명징한 이성에 기반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감정에 먼저 지배되고 난 후 이성적 마무리 공사가 이뤄진다. 내가 왜 좌파인지, 왜 우파인지 생각해보면 대게는 자신의 배경과 경험이 그 출발점이다.

운동권의 많은 전향자들이 어느날 하이에크와 미제스를 읽고 프리드먼을 알면서 전향했을까? 전향자들의 인터뷰를 보면 어떤 사건(천안문사태, 소련붕괴)에 충격을 받거나 같은 진영의 행패에 넌더리가 나서 돌아선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처럼 미군부대 앞에서 미국인은 물론 장교로 파견된 이탈리안, 독일인, 영국인과 베트남, 필리핀 여자들과 중국인 노동자들을 오래 보며 자란 사람의 다문화에 대한 생각과 한국인이 99.9%인 동네에서 자란 사람의 생각은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내가 성장 배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문화도 포용 못하는 미개한 것들, 너희는 다 등신들이야.”라고 시비를 걸어봤자 유아기적 자존감 쌓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얼마전 sns에서 화제가 됐던 ‘나라가 망해도 1번을 찍는’ 울산 아주머니에게 가해진 폭언을 생각해보자.

뉴스타파

ⓒ 뉴스타파

실질적이고 위협적인 남북대치를 경험하고 반공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 동시에 주어진 환경과 경험을 극복할 고도의 교육혜택을 받지 못했을 뿐인 사람에게 가해진 깨시민들의 폭력과 자유 원리주의자들의 폭력은 다를 바 없다. 예를들어 난 기독교인이다. 난 이주민 등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반대하는 글을 여럿 썼지만 신앙의 영역에 머무는 신념이 있는 나에게 “넌 왜 동성결혼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 안해?”라고 하는 건 곤란한 요구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신념에 기반한 한계선이 있고, 그 한계가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존중을 해주는 게 매너 아닐까?

신체적 방어능력이 없는 이에게 가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충분한 교육적 혜택을 받지 못한 정신적 약자에게 행해지는 고압적인 언사, 그게 폭력이다. NL이나 낡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선 좌우를 막론하고 그 허무함에 대한 공감대가 이뤄졌지만, 여러 곳에서 암약하는 자유 원리주의자들의 패악질도 유치하기 짝이없다. 강준만 교수의 ‘싸가지 없는 진보론’이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진보의 몰락이 싸가지 없는 태도에서 기인했다는 말이다.

강준만

ⓒ 싸가지 없는 진보 표지

이는 보수와 우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다.

오히려 NL과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실험이 실패한 경험이 있기에 한국사회에서 이미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자유 경쟁을 무한히 신봉하는 원리주의자들은 제대로 된 시험대에 올라본 적도 없기에 자신들이 선민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아간다. 그들 주장의 근간은 ‘나의 소유권이 100% 나에게 귀속된다’이다. 그러면 세금을 내는 행위는 이 명제를 부정한 노예적 행동인가? 그 행동이 꼭 100% 완벽한 소유권에 반하는 행동인가? 아직까지 해답을 찾지 못한 공공재의 과소공급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면허가 국가의 횡포라며 의사면허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면 인간이어서 갖는 태생적 한계인 정보비대칭성은 어찌 해결할 건가? 문명발전을 위해 더 좋은 방법을 포기하고 ‘자유’라는 가치만을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하나? 신념을 위해 실리를 포기하는 것, 이게 바로 도그마 아닌가?

장기매매 같은 몇몇 상생거래(쌍방이 합의한 거래)가 엄격히 제한되는 이유도 그게 ‘비인간적’이라서도 있지만 장기라는 재화(라고 한다면) 특성상 정보비대칭이 매우 심해서 자유로운 시장에서 거래하는게 매우 곤란하다는 문제도 있다. 즉, 100% 완벽한 자유가 인류 복지를 증진한다는데 대한 수많은 반론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상이 이 문단의 요약처럼 단순하지도 투박하지도 않다. 많은 학자들이 평생을 받쳐 자유를 연구한 결과들도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연구들도 수많은 연구가 있다. 그들의 강경한 주장은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듯 ‘범인’들에겐 생경한 주장이고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다. 이는 차분히 토론해야할 논제이지 고압적으로 무지한 이들을 계도하는 완장이 아니다.

이 협소한 지면을 빌려 재산권과 경제발전의 관계와 철학적 함의를 토론하려는게 아니다. 그들의 주장도 반론가능하고 반례가 존재하며 그들이, 또한 어느 누구도 100% 맞을리는 없다는 것이다. ‘자명한 명제’라는 건 참 재밌는 말이다.너무 당연해서 이게 어떻게 틀릴까 싶은 유클리드의 공리조차도 현대물리학으로 보니 사실이 아니었고, 심지어 뉴턴역학조차도 시대에 따라 왕좌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단지 인간의 사고에 불과한 ‘인본주의’라는 ‘ism’에 기반한 “자명한 명제”를 100% 옳다고 선언하는 태도가 이른바 자유주의자가 가질 태도인가?

한국경제

ⓒ 한국경제

현실정치에서 저 사악한 누진세가 미워죽겠다고 하자. 이번엔 자유주의자께서 통크게 양보해서 인두세로 합의를 봤다고 치자. 그러한 합의를 현대 민주주의 절차를 거쳐 통과시킬수있는 지도자가 지구상 70억 명중에 있을까? 철의 여인 대처도 결국 그 앞에서 무너졌다. 정말 90%의 국민들이 아직 덜 계몽되서 누진세라는 합법적 강탈을 하고 있는 것인가? 본인들은 그럼 합법적인 방법으로 누진세를 폐지키킬 방책은 있을까?

과연 효율과 합리를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보수-우파들이 ‘가짜’, ‘사이비’라서 복지와 증세논쟁에서 그들처럼 강경하지 않은걸까? 자유 원리주의자들은 인간이 극도로 합리적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정작 본인들은 생각이 다른 타인을 미개인으로 취급하며 동시에 다른 모든 인류가 합리적일 거라는 전제를 품고 사고한다는 게 아이러니다.

결정적으로 가장 큰 모순은 이들이 인간 자유확대와 궁극적 인간해방을 역사 발전의 당연한 귀결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자유 원리주의자들은 역사의 방향성과 법칙을 믿고, 그에 따른 결과를 믿는 역사주의의 낡은 굴레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며 본질적으로 파시스트나 맑시스트들과 다를 바가 없다.하버드, MIT의 학자들과 노벨상 받는 천재들이 왜 정부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연구하느라 평생을 바치는지 생각해보자. 그들에게 미제스, 하이에크 같은 현자가 있듯, 저 반대편에도 수없이 많은 현자들이 있다.

그들의 제2 롯데월드만큼 높은 학문적 성취 앞에서 겸손해지기도 하면 좋겠다.  몇 줌 되지도 않는 우파 자유주의자도 원리주의적 기준과 다르다고 찍어내고 나면 그들의 고고한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지 궁금하다.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레 자가증식하고 불어나는 정부의 규제와 크기, 파킨슨 법칙까지 비판하지 않고는 못배길 만큼 화나는 일들이 많고 좌파들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태도는 그런것을 함께 비판하는 사람들한텐 그닥 도움이 안된다.

세금의 과도한 누진성에 대해 토론하는데 갑자기, ‘아니 당신은 자유주의자면서 그럼 세금을 늘리는데 동의하는겁니까!’라고 하는데 누가 세금 나쁘다는 생각을 안하나.  나도 자유주의를 지지한다. 하지만 우리는 심시티가 아니라 피가 도는 사람들끼리 살아가는 얘기를 해야하고 결국 타협점을 찾아 예컨대 ‘그래 그럼 세금 더내자, 대신 중산층도 공평하게’라고 주장을 하는거다. 당신들보다 멍청해서가 아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보이면 “너는 진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라며 맹렬히 물어뜯고 자신들은 우월하다고 선포하는 작태. 자신은 ‘현실주의자’라고 자처하면서 극악한 이상주의자가 되버린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극과 극은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그런 ‘싸가지 없음’은 자유 원리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민들이 깨어있지 않아서 미개하고 투표를 안한다고 믿는  ‘깨시민’들과 완전히 닮아있는 것이다. 우파와 좌파는 서로를 공격하기 이전에, 공론장에서 싸가지 없는 태도로 전위대를 자처하며 팀킬을 일삼고 끝없이 갈등을 폭발시키는 자유 원리주의자와 깨시민들을 격리하는 내부 단속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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