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변해야 나라가 변한다.

ⓒ 리디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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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다. 한국에서는 소설 <사신 치바>로 유명한 작가 이사카 고타로가 2004년에 쓴 소설인데, 무지한 군중의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명의 정치인이 군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공약, 연설, 행동 등을 통해 기성정치세력을 누르고 군중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인의 선동에 조종당해 광기에 물들어가는 군중 속에서 홀로 이 모습을 지켜보며 불안감을 느낀다. 이 소설을 읽던 당시는 광우병 사태 이전이어서 무지한 군중이 지배하는 사회를 그린 작가의 시점은 생소한 것이었다. 당시 작가가 인간에 대해 너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블루레이디

ⓒ 블루레이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마왕>에 등장했던 모습들이 한국의 현실 속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감성에 호소하는 정치인들과 선동에 동참하는 언론인들, 인터넷에 떠다니는 정보를 광신하며 그들의 앵무새가 되어버린 군중의 모습이 한국 정치계를 이끄는 동력이 되어버렸다. 특히 광우병 선동이라는 기념비적인 사태는 아사카 고타로를 예언가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2004년 소설이 발매된 해, 아사카 고타로는 인터뷰에서 “정치의식 없는 일본의 신세대가 나에겐 공포다”라고 말했다. 보수적인 노인이 한 말처럼 들리지만, 아사카 고타로는 당시 일본 문학계에서도 젊은층에 속하는 30대 중반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의식 없는 “신세대”에게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런 두려움은 이사카 고타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일본 문화계는 이미 10년전부터 무지한 군중에 대한 두려움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해왔다. 중우정치로 이어질 수 있는 민주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경고해온 것이다. 문화계의 이런 노력 덕분일까, 일본 사회에는 군중의 비이성적인 사고를 고찰하고, 이를 경계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최근 일본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리갈하이>와 같이, “약자는 언제나 선하고, 다수는 언제나 옳다”고 믿는 언더도그마 현상을 비판하는 대중드라마가 등장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비슷한 류의 컨텐츠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으니 문화계를 필두로 계몽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 리갈하이의 명장면 – 국민 정서법에 대한 일침 )

반면 한국 문화계는 이에 비해 너무나 낙후되어 있다. TV드라마계는 그 뛰어난 제작 능력에도 불구하고 내용은 아직도 권선징악의 뻔한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쁜 부자, 착한 서민, 신데렐라 스토리 따위의 지루한 프레임을 고집하며 그 “뻔함”으로 흥행을 유도한다. 문학계도 마찬가지다. 문학 작가들은 민중문학, 신파의 지루함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웹툰, 웹소설 같이 새롭게 등장한 뉴미디어 계통들마저 이러한 구시대적 문화 코드를 전승하려 한다는 것이다. 절대악, 절대선의 이분법적 구분이 내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기를 좋아하는 군중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우리 옆집에 누가 사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지만 마을공동체 같은 정책은 좋은 것 같고, 비브랜드 제품은 쳐다보지도 않지만 사회적 기업은 늘어날수록 좋은 것 같으며, 극빈층의 복지혜택을 줄이게 되는 무상급식이 마냥 좋은 것이라는 착각에 이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한다. 미디어에서 그려주는 선과 악의 프레임에 자신을 끼워 맞추다 보니까 생기는 무지의 아이러니다.

세계일보

ⓒ 세계일보

 

정치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수는 절대악이며 진보는 절대선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다. 정작 투표를 해보면 보수 정당 지지자들과 진보 정당 지지자들의 숫자에 큰 차이가 없었는데도 보수의 목소리는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진보세력의 주류가 합리적인 보수의 주장마저 묵살해버려 생겨난 현상이다. 물론 최근에는 광우병, 천안함, 연평도, 세월호를 겪으며 진보세력의 감성 선동에 염증이 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여 보수의 목소리가 커졌으나, 유감스럽게도 목소리가 커진 보수세력 주류의 목소리도 진보와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어느 주장이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가 정치논의의 평가기준이 아니고, 어느 쪽에서 주장하는가를 평가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우리는 아직 떼거리 민주주의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정치에 대한 관심도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자기 머리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시크릿가든

나는 문화가 바로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문화를 통해 선과 악을 학습한다. 미디어에서는 이 구도를 그대로 사회에 적용하여 “나쁜 부자 VS 착한 서민” 내지는 “나쁜 갑 VS 착한 을”로 세상을 양단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상위 1%가 세상을 지배하며 서민들을 착취하는 것처럼 그려내어 상류층에 대한 대중적 혐오를 일으킨다. 이 혐오는 문제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접근을 막고, 오직 “상위 1%가 문제다”라는 생각에 젖게 만든다. 법과 세금으로 보호받는 상위 10% 대기업 노조들과, 공기업, 철밥통 관료들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묻힌다.

정치인들의 부도덕함을 소재로 삼지만, 정치인들의 부도덕함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드는 국민들의 시민의식의 문제는 다루지 않는다. 문화가 문제의 원인을 고찰하는 다양한 생각, 본질적인 해결을 위한 고민 등으로부터 대중들을 떨어뜨려 놓고 있는 것이다. 세상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쁜 권력자”로 단순화하면 대중들을 이해시키기는 쉽지만,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은 일본을 따라간다고 한다. 일본에서 10년 전 유행하던 먹방이 한국에서 지금 유행하고 있다. 한국 문화계도 일본 문화계의 대중문화 반성을 본받을 수 있을까? 이를 통해서 군중은 좀 더 이성적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만약 우리 문화계에 좀 더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올 수 있게 되고, 그것을 포용할만한 국민정서가 확립된다면 대한민국은 문화도, 정치도, 경제도 놀랍게 변화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