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이 업신여기던 노래 ‘아리랑’으로 보는 한국 전통의 현재와 미래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한민족 대표음악 <아리랑>의 이 가사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리랑의 이 노랫말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별의 슬픔’, ‘한의 정서’를 뜻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조선 시대부터 심심찮게 쓰였던 잡가(雜歌)의 클리셰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굳이 아리랑이 아니더라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관용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노랫말의 의미가 좀 바뀌었다. 처음에는 떠나가는 임을 향한 무한한 슬픔을 노래한 것이 아니었단 얘기다.

 

어르렁고개다 집을 짓고 / 사방영웅(四方英雄)만 기다린다 //
달도 발고 별도 밝다 / 임의 생각이 절로 난다 //
날 바리고 가는 임은 / 십리(十里)를 못 가서 / 발병 나지 (총독부조사-364)

“어르렁고개”에 놀이마당을 지어서 “사방영웅”인 풍류객을 불러 모아 한바탕 놀아보자며 “유흥”을 부추기는 노래이다. 짐작컨대 이 노래의 후렴은 “아리랑 띄어라 노다가세”이거나 “아리랑 얼시구 아라리야”일 것이다.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요/아르랑 뜨여라 놀다 가게// 놀다 가게 자다 가게/ 저 달이 지도록 놀다 놀다 가게//나를 버리고 가는 임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지” (총독부조사-153)에서 ‘임’은 놀이판에서 만난 손님이다. 이 상황에서 “나를 버리고 가는 임은/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나지”라고 하는 것은 이별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놀이판에서의 수작을 표현한 것이다.

<아리랑 노래의 정전화 과정 연구> 정우택

 

놀이판은 기생집을 뜻한다. 이 가사는 기생들이 오늘 밤 가지 말고 나와 같이 놀자며 손님을 꾀어내기 위한 노래였던 것이다.

“오빠, 오빠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자. 나 버리고 가버리면, 오빠 고자 될 걸?”

이런 뉘앙스란 얘기다.

물론, 현재의 아리랑은 그런 의미가 아니고 상술했던 것과 같다. 의미가 바뀌었다. 그 이유는 1926년 영화 <아리랑>을 연출했던 나운규의 공이었다. 나운규가 어렸을 적에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멜로디와 가사를 영화 <아리랑>의 테마곡으로 사용했는데, 이때 그 의미가 새롭게 채색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본조아리랑’은 바로 이때 작곡됐고 널리 퍼지기 시작한 무렵도 바로 이때다.

사실 원래대로의 가사라면 유교 사상이 지배적인 조선사회에서 용납하기 어려운 음란한 노래였을 테다. 그렇다. 그래서 1908년 당시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아리랑을 ‘흉악한 음담패설’, ‘말세(末世)의 소리’, ‘기생이나 창부들이 부르는 황음(荒音)’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매천야록의 황현 선생 역시 아리랑을 신성염곡(新聲艶曲, 남녀 간의 색정을 다루는 음악)이라 비하했다. 수많은 조선의 선비는 아리랑을 배척의 대상으로도 지목하기도 했다.

다행히 영화 <아리랑>의 대 흥행으로 1938년까지 총 19회나 재개봉되어 아리랑은 조선 선비들의 탄압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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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네스코

조금 더 얘기를 해보자. 나운규의 <아리랑>은 경토리(경기지방 민요의 선율적 특징)를 그대로 따랐던 민요는 아니었다. 아예 서양음악의 영향을 받은 신민요로 분류됐다. 당시 국악인들은 이 아리랑을 듣고 ‘조선의 순박한 정서를 관철시키지 않고 도회적(서양적) 풍조를 선호하여 아리랑을 경박하게 만들었다’며 힐난을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서 아리랑은 국악기가 아니라 바이올린으로 연주됐다. 또한 나운규는 어렸을 적에 자신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던 아리랑의 멜로디를 가지고 당시 단성사라는 극장 경음악단에 곡을 의뢰했다. 그러다보니 서양음악의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국악인들의 비난은 그 시대에서만 유효했던 것이다. 전통국악은 아니더라도, <아리랑>은 큰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아리랑을 유네스코에 등재시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됐다. 뭐가 됐든, 결과적으로 아리랑은 그렇게 욕이란 욕은 다 받아먹으면서 이어졌다.

 

가끔 ‘국악의 대중화’ 담론 현장을 살펴보면 실로 안타깝기만 하다. 전통을 지나치게 성역화 하여 자기들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전통성에다가 국악의 미래를 그리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악기개량 문제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국악기 특유의 음색이 사라진다 하여 개량악기의 자유로운 연구를 그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금기했기 때문이다. 피치(pitch)가 불안정 하거나 악기의 탁한 소리를 국악의 특색이라고 합의했다. 따라서 이 소리를 잃는 것은 마치 우리 음악의 전통성을 잃는 것처럼 결론짓곤 했다. 그 결과 국악은 아무도 듣지 않는 박물관 음악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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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국악원

25현 가야금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대음악과 잘 어울리는 국악기는 전무하다. 이를테면 장새납(개량 태평소), 옥류금(개량 와공후) 등 현대음악과 잘 어울리는 국악기는 모두 북한개량악기다. 이 개량은 탁성(거친 소리)을 싫어했던 김일성의 지시였다. 국내국악인들은 이러한 김일성의 철학 없는 지시를 한껏 비웃었다. 현재는 장새납 연주자를 못 구해서 안달이다. 심지어 장새납을 배우기 위해 일본 조총련계 스승을 찾아 삼만리 하는 태평소 연주자들이 부지기수다. 이것이 바로 국악계의 현실이다.

 

1926년 <아리랑>이 정전화 된 과정을 면면이 살펴보면 대단한 철학은 없었지만 시대 상황에 맞춰 제 나름대로의 전통을 이어갔다. 당시 이왕직아악부가 못했던 일을 권번 기생과 단성사 경음악단이 해낸 것이다. 전통의 당위와 맥락 다 따져가면서 순수성을 지켰다면 아마 그 전통은 진작 폐기됐을 테다. 아무도 소비하지 않았을 테니까.

쓸데없는 전통의 성역화는 그러니까 지금처럼 아리랑을 아무도 안 부르지만 한민족이라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두가 함께 부르는 민족 음악이라며 속이는 것 밖에 할 말이 없다. 슬플 때 아리랑 부르는 사람 있나? 기쁠 때 아리랑 부르는 사람? ‘무조건, 무조건이야- 짜짜라짜라짜라, 짠! 짠! 짠!’ 트로트는 많이들 부른다. 벌써 우리 민족음악은 아리랑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자존심 때문에 인정을 못할 뿐이지만.

과거에 묶여있지 말고 현재에 충실 하라. 아리랑을 배척의 대상으로 지목하던 조선의 답답한 선비가 되기 싫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