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은 절망하기를 원한다

한국인에게는 언제나 가장 절망적인 주장이 정의가 된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벌어질 때마다 군중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론의 흐름은 늘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가장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예측에 찬성표를 던지고 그에 반하는 시각 전부를 끌어내어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이다.

MERS에 대해 언론에 희망적인 시각을 전달하거나, 지나친 반응을 경계하는 의견을 낸 사람은 여지없이 여론의 재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문적 지식이나 사실에 근거한 판단은 중요치 않으며, 통계마저도 의미를 잃는다.

반면, 과장된 위험은 그 자체가 이미 정의롭다. 언론은 서로 누가 더 선정적인 예상치를 쏟아내는지 경쟁을 하고, 전문가들은 이를 악물고 이 시류에 동조하거나 조용히 눈을 감고 여론재판의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린다.

자신의 페이지에 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대중의 과도한 경계를 비판한 글을 쓴 의사는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무책임’한 사람으로 정의되고 말았다. 혼란을 더하는 전망치를 내놓아야 책임있는 사람이 되는 현실 속에서 이견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시점부터 여론의 향방을 살피던 기회주의 정치인들이 하나 둘 씩 고개를 든다. “공포”라는 먹이를 충분히 던져주기만 한다면, 대중은 “지지”라는 명령을 칼같이 따른다. “절망”에 대한 갈증을 충족시켜주는 자가 바로 주인이며, 이미 주인의 말의 사실 여부는 중요치 않다.

연예인, 사회지도층, 시민단체 등 비전문가이자 때로는 저학력이기까지 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나선다. 근거는 없으나 대중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절망을 담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사회를 규탄하고 정부를 성토한다. 반대하는 의견은 또 한번 여론의 마녀사냥을 당한다.

메르스 기사

앞 문단에서 MERS라는 단어를 광우병, 또는 다른 민감한 주제어로 바꾼다 해도 이 글은 완벽하게 성립한다. 매번 동일하게 반응해왔고, 앞으로도 예외 없이 그럴 것이다.

대중은 자유를 갈망한다. 마음껏 패닉에 빠져 사회를 어지럽힐 자유, 긍정적인 전망은 듣지 않을 자유, 책임있는 자를 찾아 공개적으로 화형시킬 자유, 상복을 입고 눈물 흘리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장사지낼 자유. 그리고, 절망할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