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 하이에크 –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을 바꾼 세기의 대격돌

 

 

니컬러스 웝숏 저,  김홍식 역,  부키 출판사.

니컬러스 웝숏 저, 김홍식 역, 부키 출판사.

 

두 거장의 첫 대면은 젊은 무명 경제학자의 관심 끌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출신 무명 경제학자는 경제학자 중 가장 유명한 케인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두 거인의 첫 조우는 싱겁게 끝났다.

 

<빈의 젊은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1927년 벽두에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케인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50년 전 프랜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가 저술한 희한한 제목의 책 수리정신학을 보내달라는 부탁이 들어 있었다. 케인스는 평범한 엽서에 딱 한 줄짜리 답장을 보냈다. “애석하게도 수중에 수리정신학 재고가 다 떨어졌군요.”>

 

이듬해 LSE에 교수로 부임한 하이에크가 학술지에 케인스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칼럼을 실으면서 두 거장의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하이에크는 학술지와 세미나를 통해 케인스의 ‘화폐론’을 조목조목 비판했고, 케인스는 즉각 반박문을 개재했다. 둘의 반목은 공식 학술지와 사적 서신을 통해 오래 계속됐다. 둘은 죽을 때 까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하이에크가 속한 오스트리아 학파는 정부개입을 죄악으로 본다. 정부는 경기가 어떤 상황인지 잘못 판단 할 수 있으며, 정부 지출 확대와 통화량 증대 따위의 인위적인 개입은 궁극적으로 물가 상승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재정 정책으로 실업이 약간 감소하더라도 물가 상승이 경제에 더 해롭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은 최소화 해야한다는 것이다. 1차대전 종전 후 발생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경험한 오스트리아 학파는 물가 상승에 극도로 예민했다.

 

반면 케인스는 국가가 적극적으로 고용과 지출을 확대하여 실업에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는 약간의 물가 상승은 큰 문제가 없으며, 실업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먼저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인스의 생각은 차후 ‘일반 이론’으로 구체화되어 거시경제학의 토대가 된다.

 

둘은 경기침체가 발생한 원인을 두고 충돌했다. 케인스는 총수요 부족을 경기 침체의 원인으로 보았으나 하이에크는 과도한 신용팽창으로 인한 과잉투자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원인이 다르면 처방책도 다른 법이다. 케인스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으로 부족한 총수요를 보충해야 한다고  했지만, 하이에크는 과잉이 자연스럽게 조정 되도록 놔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John Maynard Keynes.

John Maynard Keynes.

 

<케인스는 공공사업으로 돈이 낭비되기는커녕 기업 활동이 촉진될 거라고 주장했다. 즉 정부 투자로 실업자가 새로 고용되면 그들의 소득이 지출이 되니 그 수요를 보고 기업이 투자할 것이고, 따라서 정부가 실업자를 고용하는 것 자체가 기업에게 신뢰감을 높여 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부 투자로 직접 창출될 일자리에 더해 새로 고용될 그 사람들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민간 부문의 새 일자리가 보태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공황은 케인스의 손을 들어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케인스를 만나 자문을 얻고, 케인스식 부양 정책을 실시한 것 이다. 미국은 ‘뉴딜’ 정책을 통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기를 부양했다. 적극적인 재정 정책에 힘 입어 미국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반면 하이에크의 ‘순수자본이론’은 정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명백한 케인스의 승리였다.

 

<루즈벨트 행정부의 젊은 인사들은 케인스주의와 그 처방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행동에 옮겼다. 그들은 필요한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자금밖에 동원할 수 없었지만, 케인스주의를 낮은 수준에서라도 실행하는 것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업률은 신속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6년에 이르렀을 때는 나라 전체의 생산 수준이 1929년 수준을 회복했다.>

 

하이에크가 케인스의 약진을 넋놓고 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이에크는 1944년 대작 ‘노예의 길’을 출간하여 정부의 개입 확대는 설령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이에크는 출간 뒤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대표적인 자유주의자로 자리잡았다. 영국의 처칠도 하이에크의 주장을 일정 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대세는 여전히 케인스였다.

 

노예의 길 - 하이에크. (1944년)

노예의 길 – 하이에크. (1944년)

 

<자유시장을 버리고 계획경제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 한들 폭정을 초래하기 쉬운 길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경제를 계획하는 사람이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을 어떤 수준 이상으로 가로막기 시작하면, 모든 문제에 간섭할 때까지 그의 통제력이 확장될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했다.>

 

1차전에서는 케인스가 이겼다. 거시경제학은 미국 정부의 공식적 정책도구가 되었고, 젊은 경제학자 대다수는 케인스를 추종했다. 케인스에 반대하던 학자들도 속속 케인스 진영으로 전향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추앙받으며 1946년 세상을 떠났다.

 

<케인스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이 붙은 혁명은 별 지장 없이 행진을 계속했다. 케인스가 경기 순환을 연구한 것은 대공황기의 대량 실업을 줄이려는 동기에서였고, ‘일반 이론’은 각 나라 정부에 실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했다.>

 

세상에는 케인스주의자만 남았다. 큰 정부는 피할 수 없는 트렌드였다. 정부는 복지 정책을 통해 사람들의 삶에 깊숙히 개입했다. 세계 경제는 호황을 이어갔고, 하이에크의 주장과 달리 세상은 더 민주적이고 자유로워졌다.

 

<케인스주의로 인해 권위주의가 야금야금 파고들 거라는 하이에크의 예측과는 달리, 케인스주의적 계획이 가져온 새로운 부는 새로운 자유를 불러왔다.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10대들은 새로 얻은 자유를 과시했다. 케인스 혁명은 예부터 이어진 가난하고 고루한 시절의 전통적 관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문화 혁명을 동반했다.>

 

하이에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오랜기간 경제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면서 우울증도 깊어졌다. 힘든 나날이었다. 비주류 경제학자로 조롱 받으면서 비참한 생을 마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인고의 세월 끝에 기회가 찾아왔다. 오일 쇼크로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세계를 강타한 것이다. 케인스주의 경제학은 물가 상승을 동반한 경기침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다시 하이에크를 찾았다.

 

<실업률과 물가가 동시에 오를 수 없다고 봤던 케인스주의자들의 생각은 틀린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그들의 이론에 대한 신뢰도 많은 부분에서 붕괴되기 시작했다. 경제를 관리하기 위한 케인스의 도구들은 한동안 확실하게 작동했지만, 이제는 그 확실성이 무너졌다. 밀턴 프리드먼은 “스태그플레이션은 케인스주의의 종말이었다.”라고 말했다.>

 

하이에크의 든든한 지원군도 속속 등장했다. 프리드먼을 비롯한 통화주의자들이 하이에크 대열에 합류한다. 통화주의자들은 정부가 통화량 조절을 통해 경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어떠한 개입도 반대한 오스트리아 학파와 차이가 있었다. 하이에크의 오스트리아 학파는 정부가 통화량도 조절하면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학파와 통화주의자 모두 “정부 개입이 초래할 결과에 비관적”이었고, “자애로운 독재 권력은 조만간 전체주의 사회를 초래할 공산이 크다”고 동의했다. 두 진영은 정부 규모를 줄이고 지출을 축소하라며 케인스주의에 맞섰다.

 

<프리드먼의 경제적 사고는 하이에크가 옹호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본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프리드먼은 하이에크의 경제학 저술에 비판적일 때도 많았다. 반대로 케인스의 독창성과 거시경제학을 창시한 업적에 대해서는 늘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경제학자로서의 하이에크를 어떻게 생각하든 프리드먼은 정부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꾸준히 쏟아 내는 하이에크의 도전과 비판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개인주의의 장점을 높이 평가하고 국가 권력을 경계하는 프리드먼의 자유지상주의는 정부를 불신하는 하이에크의 뿌리 깊은 입장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Friedrich Hayek.

Friedrich Hayek.

 

이제 하이에크의 시대였다.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는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사상을 정책에 깊이 반영했다. 레이건과 대처는 하이에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정부 규모와 지출을 줄이려고 했다. 다수의 국영기업이 민영화 됐고, 통화량도 줄였다.

 

<이러한 행보는 완연한 하이에크의 사고방식에다 프리드먼을 약간 가미한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명예 교수로 있던 칼도르는 대처의 반혁명 배후에 있는 하이에크의 개념을 경멸조로 비판했고, 케인스의 정신을 부각시키는 소론 ‘대처 여사의 경제적 귀결’을 출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74년 하이에크는 노벨상을 받았다.

 

<대처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하던 시절 ‘노예의 길’을 읽었고, 1974년에는 하이에크의 그 책이 새삼 시의적절하다고 느꼈다. 보수당의 당권을 장악한 직후, 대처는 보수당 내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울어 있는 연구 조직과 회동하게 된 어느 날 가방 속에서 하이에크의 ‘자유의 권능을 세우다’를 꺼내다니 탁자에 쾅 하고 던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다!”>

 

하이에크는 1992년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이자 사상가였다. 사람들은 하이에크를 칭송했다. 심지어 The Economist조차 “조악한 케인스주의”라는 표현을 던졌다. 탈 케인스주의의 시대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금융위기가 오기전까지는…

 

2007년 금융위기로 분위기는 다시 반전됐다. 총수요 부족에 각국 정부는 적극적인 재정 지출로 대응했다. 이제 바톤은 폴 크루그먼을 위시한 네오 케인지언에게 넘어갔다. 금융위기 속에서 우리 모두는 불가피하게 케인지언이 되었다.

 

<자유시장은 그 자체의 장치만으로도 오류를 교정하고 모든 사람에게 번영을 보장해 준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었다. 이 신념이 2007년 여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하이에크의 팬이 되었음을 살며시 고백한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경제학적인 측면에서 오스트리아 학파의 이론과 청산주의적 처방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융위기에 청산주의적 처방으로 대응했다면 우리 모두 궁핍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이론은 존재하지 않고, 세상은 다양한 이론의 장점과 단점이 섞이면서 발전한다.

 

케인스, 하이에크, 프리드먼 모두 옳았다. 전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도 우리의 삶이 비참하지 않은 것은 프리드먼식 통화 정책, 케인스식 재정 정책이 모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고달픔에도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나타나지 않았다. 전체주의를 걱정했던 하이에크의 사상이 굳건히 버티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모두 위대했다.

 

이 책에 올 하반기 ‘최고의 책’이라는 찬사를 보낸다.
하이에크와 케인스의 삶을 비교 조명한 책은 경제학사, 인물사, 개론서 어느 쪽으로도 손색이 없다. 두 거장의 삶을 연대순으로 서술하면서 해당 기간 경제학 트렌드를 알려주며, 논쟁을 통해 오스트리아 학파와 케인스주의 이론을 자세히 설명한다. 경제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자. 두 거장의 인간적 매력에 흠뻑 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