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사태, 그리고 열린 보수

공화제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절대군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왕의 존재를 부정하는 제도를 공화제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북한처럼 국가로 인정하기 어려운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현대 사회의 국가 대부분을 공화국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대한민국 역시 공화국이다. 우리는 각자 보수와 진보 또는 넓은 의미에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등의 이념을 따르더라도 모두 동일한 공화국의 시민이다. 절대군주의 존재를 부정하는 공화제의 기본 원칙 아래에서 다양한 이념과 사상을 바탕으로 충돌하며 의견을 표출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지만 군주(君主)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공화국

정당한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을 존중하고, 국정 운영에 힘을 실어주는 것과는 별개로 특정 권력이 왕정이나 군주제와 같은 모습을 보이면 한마음으로 견제하는 것이 공화국 시민의 마땅한 자세다. 물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당선 된 대통령을 부정선거의 수혜자로 몰아가고, 사사건건 모든 책임을 대통령에게 물으며 국정 훼방을 사명처럼 여기는 세력에게 피로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리더라면 때로는 강한 결단으로 반대 여론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도 있다. 그러나 결단과 권력 행사가 선을 넘어가게 되면 여러 문제를 발생시킨다. 또 다시 지루하고 식상한 대통령 탓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절차적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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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유승민 체제의 새누리당과 청와대 사이의 갈등은 국회법 개정안을 계기로 폭발했다.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12분에 걸쳐 새누리당과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고, 청와대의 의지 표명에 이은 친박계 국회의원들의 단체 행동으로 유승민 의원은 원내대표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집권 여당과 청와대 사이의 호흡은 무척 중요하고,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의견 충돌이 잦아지면 원활한 국정 운영이 가능할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이 여당 수뇌부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절차적 정당성과 권력의 허용 범위다.

대통령 거부권은 정당한 권한으로 얼마든지 행사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은 삼권분립을 명시하고 있고, 행정부 수반이 판단했을 때 국회법 개정안이 삼권분립을 위배할 여지가 있다면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해서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에서 사퇴시키는 과정에서 보여준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공화국이 아니라 절대왕정의 시스템을 연상시켰다. 집권 여당과 국회의원을 국정의 파트너가 아니라 신하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표출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 배신이라는 단어까지 동원하며 정당한 의정 활동을 비난한 것, 계파 의원들을 총 동원해  노골적인 사퇴 압력을 넣은 것, 의총에서 재신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박수를 치는 요식 행위로 사퇴를 하게 만든 것, 이 모든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불과 얼마 전의 의원 총회에서 내려진 재신임 결정을 뒤집기 위해서는 그만한 절차적 정당성이 요구 될 수밖에 없다. 비박계에서 제기했던 투표나 최고위원회 전원 사퇴 후 전당대회는 고사하고,  최소한의 토론조차 없이 박수로 사퇴를 강권한 것은 정당 민주주의가 사라진 모습이었다.

삼권분립을 위배한다는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정작 유승민 의원을 원내대표에서 퇴출시키려 하며 청와대가 삼권분립을 훼손시킨 것이다. 박 대통령을 지지하고, 원활한 국정 운영을 바라더라도 절차적 정당성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가감 없이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감싸고 옹호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보수, 우파,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진보 좌파들, 특히 깨어있음을 자부하는 시민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아전인수(我田引水)격의 집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서에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중립적인 시각으로 개별적인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물러나게 만드는 과정에서 보여준 제왕적인 통치 방식과 그에 부응하여 왕정 시대의 신하들처럼 의총 결과를 뒤집고 거수기 역할을 한 의원들의 모습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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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공학적으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힘겨루기를 바라보면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세계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비박계로 분류되던 국회의원 중 최소 40명 이상이 친박계로 라인을 갈아탔다고 한다. 국민을 대신해 국회에 들어간 의원들이 가치나 이념을 따라 정치를 하지 않고, 인물과 공천권만 바라보며 거대한 권력 앞에 바짝 엎드린다는 게 증명됐다.

ⓒ 채널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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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노와 비노로 나뉘어져 계파 싸움을 일삼는 야당을 마음껏 비웃어왔지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지 회의감이 든다.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 이를테면 확고한 시장주의 원칙이나 우파적인 선명성 경쟁으로 같은 당 안에서 치열한 노선 투쟁을 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그러나 가치도, 이념도 아닌 거물들 사이의 권력 게임을 지켜보다가 이리저리 줄을 갈아타는 게 집권 여당 국회의원들의 실상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공화국에서 마땅히 지켜져야 할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도 ‘우리 편’의 일이라고 비판을 자제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태도가 보수다운 것일까.

나는 여전히 곧 죽어도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없고, 절대 악만 물리치면 된다고 우기는 세력보다는 비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보수가 더 낫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고, 같은 보수 세력 안에서 터져 나오는 다른 목소리를 ‘배신’으로 여긴다면 보수 역시 한국의 진보와 마찬가지로 고인물이 될 것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 과정에서 문제점을 느끼지 못했다는 판단 역시 존중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 자체를 ‘적군의 함성’이나 ‘배신’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보수(保守)는 외부에 귀를 닫고 지금 상태에서 변하지 않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급진적이고 섣부른 선택을 자제하되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혁신하며 신중하게 변화하는 것이 보수의 참 모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의 여부를 떠나 다양한 의견에 귀를 열어야 하고, 한 인물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하나의 목소리만 추구하게 되는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

보수의 품격을 지키는 길은 무작정 개혁을 부르짖는 것보다 훨씬 험난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