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이전에 아르헨티나가 있었다

그리스 사태를 통해 우리는 모두 교훈을 얻었다. 인기몰이에 나선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하는 척 감당 안 되는 정책을 펴면 나라 꼴이 어떻게 되는가를 실감나게 배웠다. 그리스 사태를 두고 복지 때문이다, 복지 때문이 아니다, 아직까지 말들이 많지만, 이유가 어째됐건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도 방만한 정부지출을 줄이는 것에 반대한 국민들, 이러한 여론에 편승한 언론과 지식인들, 그리고 이들의 표를 위해서 이미 빚더미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빚을 만들어 대중의 근시안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왔던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그리스를 파탄에 이르도록 만든 주요원인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 체제의 약점인 포퓰리즘과 중우정치에 있다.

네이버 사전 검색 포퓰리즘 중우정치

이미지 출처: 네이버 사전 검색 ‘포퓰리즘’, ‘중우정치’

포퓰리즘과 중우정치에 의해 몰락한 나라는 비단 그리스뿐만이 아니다. 그리스 이전에 아르헨티나가 있었다. 1940년대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부유한 나라였다.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탄탄한 중산층과 안정적인 사회를 구축했고, 당시 금액으로 15억 달러라는 막대한 준비금을 축적하기도 했다. 국민들의 삶의 질은 서유럽에 버금갔으며, 남미에서는 최초로 세계적인 경제 도약을 이룩한 나라였다.

 

그런데 후안 페론(Juan Peron 1895~1974)이라는 포퓰리스트의 등장 이후 번영한 이 나라가 기울기 시작한다. 페론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외부 자본 추방”, “경제적 자립” 등과 같은 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외부의 적’을 만들어내고, 국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한 다음, 적들에게 대항할 단호한 의지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또 노조와 결탁하여 노동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기도 한다. 연예인 아내 에바 페론(Eva Peron)의 역할도 컸다. 그녀의 활발한 사회봉사활동은 아름다운 미모와 맞물려 수많은 미담을 만들어냈고, 후안 페론의 선전과 홍보에 상당히 큰 기여를 한다. 결국 후안 페론은 1946년 2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된다.

후안 페론, 에바 페론

후안 페론(우)과 에바 페론(좌) ⓒ 국민일보

후안 페론은 자신의 정치이념을 “정의주의 (Justicialismo)”라 포장했다. 직접 대중들 앞에 나서 정의(Justice)를 부르짖었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책들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 선동했다. 국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이어지는 정책들을 결정함에 있어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정의로운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페론은 항상 스스로를 정의의 편에 세웠다.

또 페론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필요한 모든 것을 즉시 가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그는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이라는 명목으로 노동입법을 추진하여 모든 노동자들이 유급휴가를 즐기며 한 달치 임금을 더 받도록 했다. 이렇게 노동, 교육, 의료, 주거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정부의 지출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증가시켰다. 한편, 주요 기간 산업들은 모조리 국유화했다. 번영했던 한 나라가 이렇게 몰락의 길에 올랐다.

불과 집권 6년 만에 이전에 쌓아온 준비금이 모두 바닥나버렸다. 국유화된 기간 산업의 공기업들은 생존경쟁을 경험하지 않은 동물원 속 야수들처럼 무능력했다. 나라 전체의 생산성이 바닥을 쳤다. 국민 소득이 줄어드니 세금을 걷기도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정부의 규모를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져 준다’라는 생각에 젖은 국민들은 끊임없이 복지를 요구했다. ‘국가의 미래’보다 ‘정치적 인기’를 더욱 중요시하는 포퓰리스트의 말로는 뻔하다. 인기를 위해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인기에 의해 끌려다니게 된다. 페론은 중우정치에 빠져있는 대중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다. 당연히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독일_인플레

당시 아르헨티나는 수레에 돈을 가득 싣고 가야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사진은 1차 대전 이후 인플레이션을 겪는 독일) ⓒ AP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0년의 집권기간 동안 페론은 아르헨티나를 완전히 타락시킨다. 비단 경제만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국민성 자체를 타락시킨 것이다. 전원책 논객은 그의 저서 ‘자유의 적들’에서 아르헨티나가 ‘복지국가’라는 선동적인 주술에 걸려 “제 살을 뜯어먹는 몽환”에 빠졌다고 말한 바 있다. 감언이설로 국민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은 어리석은 대중들을 만들어냈고, 결국 중우정치로 이어졌다. 1955년 9월,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정권이 넘어갔고, 페론은 파나마로 도망친다. 새롭게 등장한 군부정권은 정부의 규모를 줄이고, 국가의 생산성을 높여보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아르헨티나는 몽환에 너무 깊게 취해있었다.

한편 페론 역시 집권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파나마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간 페론은 극좌, 극우를 가릴 것 없이 전투적인 활동을 하는 조직들과 관계를 맺었다. 공산주의 혁명을 준비하는 좌익 전투조직과, 반공주의 성향의 우익조직들이 페론의 지원을 받았고, 이는 페론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반면 아르헨티나의 군부정권은 복지국가의 망상에 빠져있는 국민들을 노력과 경쟁의 길로 내몰았고, 결국 이는 그들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1973년,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주의’를 내세운 후안 페론의 추종자 엑토르 캄포라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다. 같은 해, 캄포라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라울 라스티리가 대통령 직을 승계하고, 라스트리는 3개월 후 다시 사임한다. 결국 10월, 후안 페론이 대통령 자리에 다시 앉고야 만다. 73년 한 해에만 네 명의 대통령을 가진 아르헨티나는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후안 페론은 취임 직후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탓’이라며 다시 외부의 적을 만들어냈고, 반미, 반 자본주의를 설파하며 국민들을 선동했다. 페론은 여전히 정의(Justice)를 이야기하며 국민들을 부추겼고, 당장 다음 끼니 걱정을 해야하는 가난한 국민들은 정의감이라는 아편에 도취되어 빈곤한 삶을 이어갔다.

아르헨티나 빈곤 시위 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치안 불안, 꾸준한 물가 급등과 빈곤층 증가 등이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아르헨티나는 왜 이렇게 철저히 몰락했을까?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할 줄 아는 국민들이 적었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 후안 페론의 달콤한 말을 추종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완성품’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이며, 그 길목에는 포퓰리즘과 중우정치라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은 항상 이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완성품이라 생각했던 국민들이 나치와 파쇼를 낳았고, 아르헨티나와 그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 치프라스 총리는 국가부도 상태임에도 정부지출을 줄이는 것에 반대한 국민투표 결과를 두고 “민주주의의 승리”라 칭한 바 있다. 그는 민주주의와 중우정치를 구분하지 못했다.

한국에도 이러한 정치인들이 있다. 그리스 사태를 보며 섬뜩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