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의 스마트한 세습이 시작되었다.

사회가 안정화하고 고도화 될수록
기득권을 갖게 된 사람들은 그것을 세련되게 지키는 방법을 고안해 낸다.

 

마치 현재의 구조는 잘못되었으니 그것을 고쳐야하고, 약자를 배려한다는 모양새를 내는데, 그게 결국은 자신들의 세습을 위한 위장용 수사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거에 법조인, 의사가 되는 길은 명확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하거나, 의대에 진학해 국시에 합격하거나.
이는 모두 ‘점수’라는 계량화된 팩터에 의한 정량평가였다.

아무리 법관 아들딸, 병원장 아들딸이라도 점수 안 되면 부모의 직업을 세습할 수 없었다. 잘해봐야 외교관 자녀가 외시2부라는 좁은 문(보통 외시 30명 선발시 6명 이내)을 통해 비교적 덜한 경쟁을 거치는 경로는 있었으나, 이 역시 객관화된 점수로 자신을 증명해 내야 했기에 적어도 세습 논란은 적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486~586이 된dk 386들이 자기 직업을 어떻게 하면 자녀에게 티 안나게 세습해 줄 수 있을까, 그것도 좋은 핑계를 가지고… 라고 해서 도입된 게 로스쿨과 의전원이 아니던가.

법조인 아들딸은 이제 더 이상 몇 년간 다른 학생들과 같은 조건의 사시라는 험난한 여정을 거칠 필요 없이, 그보다 상대적으로 쉬운 로스쿨 진학을 하고, (입학전형에서도 정성평가가 큰 비중을 차지해 누구 아들딸, 친인척이라는 인맥이 효험을 보임은 물론이거니와) 판사 고모부, 변호사 아버지 등 가족의 유산 덕분에 졸업 후 대형로펌 입사를 예약하는 입도선매까지 받게 되었다.

서민 아들딸들은 입학전형에서 더 높은 필기시험점수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정성평가에서 물을 먹고, 어찌 로스쿨에 들어가 몇 년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부잣집 자식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감비용을 지불하고도 로스쿨 졸업 후가 불투명한데 말이다.

사법시험 시대에는 부자든 빈자든 그냥 사시 합격하고 연수원 등수 높으면 출신성분 가리지 않고 법조인으로서 탄탄대로를 걸어갈 수 있었다.

 

ⓒ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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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는 또 어떤가.

병원장 아들따님들은 전국 이과계열 최상위권 수능점수를 맞아야만 진학하는 의과대학에 합격하지 못해도 상대적으로 쉬운 의전원, 치전원을 통해 직업을 세습할 수 있게 됐다.
90년대에는 강남8학군 부유층 자녀들의 사교클럽은 서울 상위 9개 대학에 개설됐던 국제지역대학원이었다. 이제는 로스쿨과 의전원이 강남 자제들의 사교클럽으로 변하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세습을 정당화 하는 것은 고시낭인이라느니 직업의 문호개방이라느니 다양한 전공과 배경을 가진 인재들의 전문직 진입이니 하는 것들이지만, 결국 더 이상 상고출신의 법조인을 볼 수 없게 되었음은 명약관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로스쿨은 상고 출신 대통령의 씁쓸한 사다리 걷어차기였다.

오직 점수로만 경쟁할 때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희망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 점수의 비중은 줄어들고, 학부로도 모자라 대학원 과정에 수반되는 억대의 시간과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자산의 비중이 높아진 셈이다.
대학입시도 마찬가지다.

내신이니 뭐니 아무 것도 안 보고 오직 한가지 요소, 학력고사 점수로만 대학전형을 했을 때가 그나마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희망이 있던 시대였다.

내신은 학창시절 내내 꾸준히 관리해줘야 한다. 학력고사/수능 같은 단칼 진검승부가 아니다. 수능은 사고력 측정 시험이라 그나마 모든 필기시험 중 사교육의 영향이 가장 적은 편에 속하는데, 내신은 사교육이 바로 점수와 연결된다.

결국 학력고사와 수능 위주의 입시 제도는 한 가지 목표에만 에너지를 집중하면 되는 시스템이다. 넉넉치 않은 환경으로 인해 여러 가지를 동시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가난한 학생들에게도 부자들과 비교적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그라운드였다.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학창시절 내내 에너지를 분산해서 내신은 물론이고 각종 경험 쌓기와 취미 활동까지 해내야만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을 받는다. 당연히 안정된 가정환경과 사교육의 공헌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내신비중 강화의 배경에는 전교조든 교총이든 좌우를 가리지 않는 교사들의 제밥그릇 챙기기도 한몫을 했다.)
내신 위주의 수시전형 제도로 정시 인원 상당수를 분할한 것은 시작이었고,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은 화룡점정이 됐다.
학력고사 시대에는 부잣집 자녀도 점수 안 되면 속칭 지잡대를 가야 했다.

이제는 점수 안 되는 부잣집 자녀에게 드넓은 대안이 생겼다.

수천가지의 전형을 분석하고 컨설팅하는, 평소 내신관리 및 각종 스펙관리를 해주는 사교육 시장이 생겼고, 그로인해 입학사정관제와 같은 정성평가 전형을 뚫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사교육비 지출이라는 부의 팩터가 더 크게 작용하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만큼 정시의 문호는 줄어들어 모두가 그나마 비슷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그라운드는 훨씬 좁아졌다.

이 역시 점수경쟁은 비인간적이며 다양한 특기를 존중하자는, 보기 좋은 명분을 내세운 386(현 486,586) 부유층의 자녀에 대한 학벌 세습 시도의 결과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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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입사도 마찬가지다.

대학교 레벨 + 학점 + 토익, 세 가지 계량화 된 숫자로 뽑을 때는 입사 커트라인이 예측 가능 했고, 누구든 준비할 것을 준비하면 됐다.

갑자기 되지도 않는 인문학이니 통섭이니 다양한 경험이니 인성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문화자본이 풍부한 부잣집 자녀들의 문을 넓혀주기 위함이다.

과거라면 서민층도 학력고사 잘 보고, 좋은 대학 가서 학점과 토익점수를 올리면 얼마든지 들어갔을 직장에 이제는 어려서부터 여유있는 환경에서 자라며 다양한 경험과 취미 활동을 한 사람들이 자리를 꿰차게 된 셈이다.
특히 한국처럼 상호 신뢰도가 낮은 사회에서는 결국 정량평가로 가는 게 최선이다. 정성평가에서는 평가자 개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지고, 그에 따라 비리가 개입 될 여지가 무척 높다.

어차피 모두에게 완벽히 동등한 조건의 경쟁이란 존재할 수 없지만, 그나마 정량평가 위주의 전형은 예측이 가능하고, 준비할 것들을 한 두 가지로 단일화 해서 없는 집 자녀도 다른데 신경쓰지 않고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나마 경쟁의 장을 덜 기울어지게 만드는 것다.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은 된다.

반면 전형요소가 다양해지고 전형방법이 늘어날수록, 그리고 평가자의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는 정성평가 비중이 높아질수록 결국에는 있는 집 자녀에게만 유리한 시스템이 된다.

 

또 한 가지, 소수의 특별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우대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기 마련이다.

예컨데 미국에서는 흑인을 우대하는 인종 혜택을 부유층 흑인이 쓸어가면서 서민층 백인들을 좌절시켰고, 한국에서는 농어촌 특별전형 등으로 무늬만 읍면인 위성도시의 부유층 자녀들이 도시빈민의 자리를 잠식하게 됐다.

지방대 우대책 덕분에 서울 소재 대학에서 성실하게 노력한 서민 자녀들보다 지방대에 진학한 지역 유지의 자녀들이 혜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냉정하고 삭막해 보여도, 특히 우리나라처럼 사회적인 신뢰도가 낮은 국가에서는 정량화 된 점수로 기준을 삼는 것이 그나마 빈부격차를 줄이는 공정한 경쟁 방식이다.

입시는 수능. 전문직은 고시. 취업은 스펙.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