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복지의 맹점

대선 복지공약

​▲ 인기몰이를 위해 지나친 복지 공약을 내세운 지난 대선의 양 후보. 문 후보의 경우 무려 두 배 이상 규모의 복지 공약을 내세웠다. <이미지 출처: 동아일보>

 

복지 공약 이행과 관련하여 말이 많은 요즘이다. 여당은 복지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야당은 복지 공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애당초 보편적 복지 공약은 한국의 경제구조상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지난 대선 새누리와 새정치민주연합은 표심을 모으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상 복지 공약을 내놨다. 결국 포퓰리즘에 기인한 공약들은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족쇄가 되어버렸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터무니 없는 꿈은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 자명했다. 증세 논란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결국 복지 규모를 축소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의 진짜 문제는 경제현실성 부족이 아니라 효율성의 부족이라는 측면에 있다. 보편적 복지는 복지 혜택이 절실한 이와 복지 혜택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복지 혜택을 일괄적으로 주는 것이다. 당연히 혜택의 질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무상 급식’을 그 예로 들어보자.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 모두가 공짜 밥을 먹게 되면, 세수입에 간신히 짜맞춰진 비용으로 식단이 구성되므로 식사의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무상급식을 실시한 이후 전국 초 중학교의 음식물 처리 비용은 급증하였다. 급식의 질이 떨어져 버리는 음식이 많아진 것이다. 2010년, 85억 원에 이르던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이, 무상급식을 실시한 후 2013년에 123억 원으로 치솟았다. 2014년에는 135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이다.

반면 꼭 필요한 이에게 혜택을 주는 선별적 복지는 가난한 이에게는 고급 복지 혜택을, 여유가 있는 이에게는 선택의 자유를 준다. 선별적 복지의 예로써, 가난한 집 아이에게 급식지원비를 준다면, 가난한 집 아이는 집중된 복지 혜택을 받게 된다. 이 경우 부잣집 아이나 가난한 집 아이나 모두 질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무상 급식에 들어가는 비용이 커 여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년도(2015년) 예산에서 ‘중학교 학습 준비물 지원비’(2014년 예산 23억원)를 전액 삭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 모두 공짜 밥을 먹이자는 보편적 복지 정책에 의해, 가난한 집 아이의 교육의 기회를 위해 마련된 선별적 복지 금액이 삭감된 것이다.

보편적 복지 반대를 외치는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본인의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부자에게 자유를 서민에게 기회를!

나는 이것이 진정한 복지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부자의 복지는 부자답게 사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호화 사치 생활을 하던 외제차를 타던 눈치보지 않고 사는 자유를 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라면, 서민은 부자가 될 수 있게 끊임없이 국가가 보살피고 도와주는 것이 복지라고 본다.

<출처: 홍준표 경남도지사 페이스북>

복지

▲ 어느 쪽이 올바른 방향의 복지일까?​

 

복지 정책은 부의 재분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자유주의 철학자 존 롤스는 태어난 집안, 배경, 재능 등에 따라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기회와 부를, 분배 정의에 기초하여 재분배하는 복지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이러한 분배 정의를 이룩할 수 없다.

재벌 집안의 자식과, 기초 소득 가정의 자식이 같은 밥을 공짜로 먹는다고해서, 양극화된 부가 효율적으로 재분배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그러한 보편적 복지가 선별적 복지에 들어가는 예산을 갉아먹고 있다면, 오히려 이는 부의 재분배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셈이다.

공짜라는 말은 언제나 달콤하다. 특히나, 그 공짜가 모두에게 적용된다면 이는 이상적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공짜 때문에, 도움이 절실한 이가 모두와 똑같은 수준의 질 낮은 도움을 받게 된다면? 과연 이는 옳은 것일까?

보편적 복지의 맹점은, 단순히 그것이 한국의 세수입 규모 상 지속되기 어려운 제도라는 것뿐만 아니라, 엄격한 평등주의라는 악몽 아래 정작 도움이 절실한 이를 외면한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