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체,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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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문학과 교양강의를 중시하는 학교 커리큘럼 덕에 꽤 많은 토론수업과 인문강좌를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왜 인문학이 엉망진창이며 사망위기에 몰렸는지 깨닫는 경험을 여러 번 하게 됐다. 내 경험의 대부분은 수업과 토론을 거치며 느낀점들이다.

 

2. 우선 자본의 논리에 대한 이해가 얕다. 이들은 ‘자본의 논리’라는 말로 논쟁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이 자본의 논리로 공격을 하면 대처할 줄 모른다. 왜냐면 이들을 가르치는 이들도 그들의 텍스트에도 70억의 지구가 왜 자본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는지 정교하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의 98%의 운영논리인 자본의 논리를 2%의 비중으로 공부하고 세상의 눈에는 매니악한 분야에 매진한다.

 

3. 그래서 논쟁에서 제대로된 단어를 사용하질 못한다. 사회의 경제적 문제를 다룰 때 형용사가 배제된 올바른 단어선택을 통해 토론하지 못한다. 예컨대 복지를 논할 때, 약자에 대한 온정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럴때 사중손실이나 지대발생의 문제점, 경제적 동맥경화 현상, 근로의욕 저하 등의 포멀한 단어가 등장하면 반박할 힘이 부족하다. 문학적이지 않아야 할 토론에서도 문학적으로 나선다. 결국 논쟁은 ‘누가누가 더 착하나’로 귀결된다. 공자선생의 말을 빌리면 ‘정명’ 즉, 올바른 단어사용에서 엇나가 있다.

 

4. 아젠다 제시에서 대차대조표를 첨부하지 못한다. 사회적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려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그 방안의 장점과 단점을 읽을 수 있게 제시해야한다. 그러나 그러한 대차대조표를 첨부하는 방법을 모른다. 어떠한 방안은 어떠어떠한 장점이 있으며 반면에 이러한 비용요소가 있다, 이런 식의 주장 말이다. 상대와 공유하는 언어와 대차대조표가 없으니 활력 있는 논쟁이 불가능하다.

 

5. 대차대조표를 첨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계에 문맹이고 자료조사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통계를 가져올 줄 모르는 것뿐 아니라 상대가 엉터리 통계를 가져왔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예컨대 우리나라 자살률 통계를 가져와서 청소년 부분만 떼어서 제시한 후 ‘우리나라는 매우 자살률이 낮습니다’하는 체리피킹을 해도 이를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토론을 하면서 이런 식의 장난질은 언제나 성공적이었다. 강의실에서 통계는 믿지 못한다고 핏대 높이던 원시인도 만난 적이 있다. 결국 학문이란 것이 ‘경세’의 문제라면, 이러한 실증적 접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6. 2번과 5번이 조합되면, 사짜들에게 혹한다. 예컨대 우석훈 같은 이상한 경제학자들의 마이너한 주장에 동하게 된다.(이 분이 민주당 경제분야 중책을 맡은걸 보고 아연실색했다.) 학계에선 참신한 주장을 허술한 통계와 함께 들고 나타나면 맛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한 텍스트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 텍스트로 논거를 탄탄히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텍스트가 약점이 되는 촌극이 벌어진다.

 

7. 내가 토론하며 자주 들었던 말은, ‘~~학에서는 ~~라고 생각해요’, ‘~~학을 배워보시면 아는데’라는 식의 말이다. 앞서 꼽았던 두가지 이유로 논쟁이 잘 안 통할때 사용하는 말인데, 이건 그냥 ‘나는 뭐라 말할지 모르겠습니다’와 다를바 없는 표현이다. 세상의 메커니즘을 백안시한 대가다. 지난 국정화 논쟁 때도 사상의 자유나 시장메커니즘이 담론을 주도하는 것은 봤어도 역사학계가 대중적으로 어떤 반향을 이끌어냈는지 의문이다. 물론 우리는 ‘경세’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다, 라고 한다면 인정. 그런 자세라면 사회적 논쟁에는 수저를 얹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학문이라면 집에서 독서로 배워도 충분하다.

 

8. 선악구분에 익숙하다. 경제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느끼는 점이 뭐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것. 즉, 세상사에 사람들의 행동은 다 자기 잘되려는 행동이라는 것을 전제로 던지고 정말 그런지를 몇년간 공부한 결과 세상사 다 자기 먹고 살려는 거구나 라는 결과에 도달한다. 개인의 선악에 기반한 토론이 아니라 보편성에 기초를 두고 접근하기 때문에 누가누가 착하나 하는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약 누가 나빠서 그렇다, 라고 토론할 거라면 토론을 할 이유가 뭔가? 전제부터 개별성을 전제한 토론은 지루하다.

 

9. 인문학 고수분들이 읽기엔 괘씸한 글일 것 같다. 이런 건 다 제대로 공부 안한 탓이지 인문학의 탓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적어도 대학 캠퍼스 내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토론을 할만큼 인문학적 독서로 무장한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람을 공부한다면서 가락시장에 내놓으면 배추 한 포기 팔 정도의 현실에 대한 감각도 없다는 것. 그게 결국 문제의 핵심이다. 독서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다. 글도 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세상에 나와 본 적도 없다. 도서관에서 하루키 책은 빌리려면 두 달이 걸리지만 인문사회서적 중에 한 번도 예약을 걸고 기다려 본 적이 없다. 남들은 온갖 경험을 쌓고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현재의 메커니즘을 공부하는 종합격투기를 하는데, 외로이 본인들의 무술만, 그것도 설렁설렁 연마해놓고 사회에선 쳐주질 않는다하니, 사필귀정 아닌가. 누군가는 중세국어의 음운구조를 연구하고 누군가는 현상학에 평생을 바쳐야 인간의 지식은 성장한다. 하지만 공론장에서 세상을 운영하고 공동체의 방향을 토론할 때와 상아탑에서와의 자세는 달라야하지 않을까? 어느순간 ‘과학’의 여집합이 인문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건 아닐까?

 

To. 입학과 동시에 서클에 들어가고 필독서를 추천받고 공부하셨던 인문학 선배님들, 지금 대학의 인문학과 인문학도들은 이렇게 약체가 됐습니다. 불한당 같은 신자유주의자와 붙어도 제대로 논파해내지 못합니다. 슬프게도 사명의식은 사라졌고, 당신들이 읽던 책은 아무도 빌려가지 않습니다. 86선배들에겐 낡은 담론이라도 있지만, 이제 대학 내에는 담론을 생산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점차 인문학은 아무도 찾지 않고 찾을 이유도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상아탑’이라는 존칭은 생략해도 될때가 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3천년 전 적자생존의 춘추전국을 가로지르던 맹수들은 안락한 캠퍼스에서 살이 통통 오른 초식동물이 되어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