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세계 여성의 권리와 미국 대통령

1973년, 낙태와 관련한 ‘로 대 웨이드 (Roe v. Wade)’ 소송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본인 신체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며, 여성에게 임신 후 6개월까지 자의적 판단으로 낙태를 시술받을 수 있는 헌법 상의 권리를 부여했다. 이 판례에서 미 연방 대법원은 “임신을 끝낼지의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여성의 결정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자유와 권리에 대한 재인식을 바탕으로 낙태를 지지한다.

로 대 웨이드 소송의 판례는 낙태에 관한 논의의 주요 분기점이 되어, 향후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 법원은 여성의 권리를 일관된 태도로 지지하며 여성의 낙태 결정 권한을 존중하기 시작했다.

“개인의 존엄성 및 자율권과 관련해, 임신을 끝낼지 여부에 대한 여성 자신의 결정보다 더 적절하거나 근본적인 요인은 없다. 그런 결정을 자유롭게 내릴 여성의 권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Thomburgh v. American College of Obstetricians​ 1986)

이렇듯 미국은 낙태와 관련한 논의에 있어 국내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유와 그 권리를 지지하는데, 정작 다른 나라 여성의 권리는 침해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을 보인다.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글로벌 개그 룰(Global Gag Rule)”이라는 억지스러운 암묵적 규칙이다.

gagrule

▲ 여성의 권리를 위해 레이건 행정부의 Global Gag Rule에 투쟁하고 있는 여성. <사진: Globalsolutions>

 

여기서 개그(Gag)란 우리나라 말로 ‘재갈’을 뜻한다. “글로벌 개그 룰”은 미국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나라가 낙태 합법화에 대해 찬성하는 듯한 발언이나 제스쳐를 취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쉽게 말해 낙태 찬성의 의견을 표하려는 제3세계 국가에게 재갈을 물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남미, 발칸 반도, 아시아 지역에 있는 제3세계 국가의 의료기관들은 미국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다. 이 제3세계 국가의 의료기관들은 전적으로 미국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이들에게 재정지원을 함으로서 제3세계 국가의 병자들을 치료할 여건을 조성해주었다. 단 한 가지 조건 하에. ‘글로벌 개그 룰’에 암묵적으로 따르라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는 제3세계 의료기관에서 낙태 이슈와 관련하여 낙태 찬성론(Pro-abortion)의 뉘앙스를 조금이라도 비추거나, 낙태 시술을 하게 되면 미 정부는 즉각적으로 해당 의료기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끊어버린다.

묘한 부분은, 정작 미국 내에서는 임신 12주 이내에 행해지는 낙태가 합법이며, 임신 12주 이후에도 낙태를 허용하는 몇몇 주에서는 주법에 따라 모든 형태의 낙태가 합법적으로 허용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벌어진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정당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미국은 양당체제로, 보수세력인 공화당과 진보세력인 민주당이 있다. 성격이 다른 두 당은 상이한 가치관을 가지는데, 이에 따라서 공화당은 낙태 반대론을, 민주당은 낙태 찬성론을 펼치며 서로 대립해왔다.

미국 제 40대 대통령 레이건 때 처음 시행된 이 ‘글로벌 개그 룰’은 제 41대 부시 행정부로 이어졌다. 공화당에서 배출한 이 두 대통령은, 공화당 후보답게 종교적(기독교적) 신념이 강했다. 미국은 미대통령 개인의 종교관에 의해 제 3세계 국가들에게 낙태와 관련하여 재갈을 물린 셈이다.

낙태는 경우에 따라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다. 특히 산모의 생명이 태아에 의해 위태로울 때가 그러하다. 산모의 건강을 보호하고자 시술되는 낙태는 산모의 생명을 구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의료 행위다. 그 중요성 때문에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합법적 낙태 시술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개그 룰’의 영향으로 인해, 제3세계 여성은 재정 지원을 받는 의료시설로부터 낙태 시술을 거부당했다. 수많은 제3세계 국가 의료시설들이 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끊기는 것이 두려워, 경우를 불문하고 모든 형태의 낙태 시술을 거부한 것이다. 낙태 시술을 거부당한 여성 중에는 태아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거나, 강간이나 근친상간 같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임신한 여성들도 있었다. ‘글로벌 개그 룰’로 인해 의료시설들이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피시술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합법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불합리성을 느낀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클린턴 (제 42대 미대통령)은 이 ‘글로벌 개그 룰’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공화당에 비해 기독교적 색채가 약하고, 여러 종교들에 있어 비교적 관용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민주당이 이전 행정부의 “기독교적 신념 강요”라는 횡포를 멈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공화당 출신의 제 43대 대통령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한 일중 하나가 이 ‘글로벌 개그 룰’의 부활이었기 때문이다.

이 독선적인 규칙이 폐지되었다가 다시 시행됨으로써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해졌다. ‘글로벌 개그 룰’의 폐지로 수많은 제3세계 국가의 의료시설들이 각각의 도덕적 판단에 따라 낙태를 시술하기 시작했는데, 낙태 시술을 시행했던 이 의료시설들에 대한 재정 지원이 끊어져버린 것이다.

제 44대 미 대통령 오바마는 민주당 출신답게 다시 이 ‘글로벌 개그 룰’을 폐지시켜버렸다. 이렇듯 ‘글로벌 개그 룰’은 어느 정당 출신의 후보가 미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폐지되었다, 부활되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미국 대통령 개인의 (혹은 정당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제 3세계 국가의 수많은 산모들의 권리와 생명이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물론 막대한 해외 원조금을 지출하며 타 국을 돕는 미국이 그들의 원조에 어떤 ‘조건’을 다는 것은 크게 문제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국 내에서 금지된 종교적 독선(혹은 가치일원주의)을 빈국에게, 그것도 “도움”에 대한 대가로서 요구한다는 것은 도의적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횡포가 미국 대통령의 개인적 가치관에 따라 들쑥날쑥한다는 것이 문제를 한층 더 악화시킨다. 대통령이 바뀔 때 마다 생기는 미국 정권의 변덕에 따라, 가난한 나라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은 일희일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