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차별,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일까?

<비명문대생의 비명>

 

입시라는 전쟁이 끝나고, 그에 따른 결과에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요즘. 피 튀기는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은 그간의 노고에 따른 성취감을 한껏 만끽하고 있지만, 누군가의 성공은 곧 누군가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원인을 타자로부터 찾는 이들의 불평불만은 항상 승자들의 기쁨과 동행한다.

 

 

최근에 일었던 ‘합격자 현수막’ 논란은 그 일례라고 보여진다. 특정학교 합격 현수막을 게시하는 관행이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것이라며, 명문대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아예 대학교 진학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실제로 국가인권위원회도 이에 대한 성명을 낸 적이 있다.

 

 

하지만 노력한 이들의 성취는 도외시하고, 다른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우선시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온정에서 기인한 행동들은 언제나 정의로워 보이지만, 늘 그렇듯이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진정성도 효용성도 없다.

 

 

오히려 뜻이 있어 대학교에 가지 않은 이들과 비(非)명문대생들의 목소리를 모두 비명으로 치부하는 일부 사람들의 독선이 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학벌주의라는 편견>

 
편견에 관한 에드먼드 버크의 설명만큼 학벌주의를 잘 나타내는 말은 없는 것 같다. 버크는 편견이 우리를 현명한 행동으로 향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동시에 편견 자체가 무엇이 현명한 행동인지 알려주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편견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옹호하는데, 여기서 이성이란 편견이 지닌 본유적 가치나 통찰이 아니라 사회적 효율성을 함의한다.

 

나는 학벌주의가 이 편견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본다. 확연히 드러나는 정량적 평가요소가 동일하다면, 차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학벌인 것이다.

 

학벌 자체가 대단한 가치를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효율적인 지표라는 뜻이다. 그리고 단순히 학교 간판만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학벌이라는 결과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이미 그들 대부분은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실력도 없으면서 학벌 만능주의를 믿고 오만하게 구는 사람들은 어차피 도태되기 마련이며, 마찬가지로 출중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학벌 때문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무언가 잘 안 풀린다면, 그것은 학벌의 문제이기 이전에 실력의 문제일 확률이 높다.

 

 

<학벌주의의 역차별>

 
부산교육대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1,417명은 “수도권 지역 초등교사 시험에서 같은 지역 교육대학교 출신에게만 가산점을 주는 것이 헌법에 위배된다”며 헌법소원심판을 제기했다.

 

지방교대에 다니는 이들이 수도권에서 초등교사가 되는 데에 불이익을 겪으므로 공무담임권이 침해 된다는 것이 주요 논거였다.

 

우스운 사실은 그런 정책을 이미 다 알고 지방 소재의 교대에 입학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야 본인들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느냐는 점이다. 해가 지나면서 갑자기 권리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당시에 없던 제도를 신설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불평등하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이를 합헌이라 결정했다. (2010헌마747) 그런데 혹자는 이걸 가지고 ‘교대 서열화’ 혹은 ‘지방 교대 차별’이라는 올가미를 걸어 학벌주의와 연동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흔히 말하는 약자 코스프레를 통한 역차별을 경계해야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서울대 폐지론>

 
대한민국에서 서울대를 가장 싫어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전북대 강준만 교수를 택하겠다. 그의 저서 ‘서울대의 나라’를 보면 “서울대는 학생 수를 지금의 2분의 1 규모로 과감하게 자기축소를 해야 한다”는 텍스트가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서울대를 포함한 주요 국립대들 사이에 상호 보완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학사과정에 한시적으로 서울대 명칭의 입학생과 졸업생을 내지 않도록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서울대생이 아니어서 필요 이상의 증오심이 솟구치지는 않았다. ‘대학개혁’이라는 명목 하에 실질적인 서울대 폐지론은 노무현 정부 때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물론  여론 반발에 의해 이내 묻혔지만, 이러한 대학개혁론은 지난 18대 대선 당시 민주당의 당론으로서 손학규 전 대표가 강하게 지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대를 폐지하면 학벌주의가 완화될까? 국립대를 제외한 명문사립대들을 중심으로 학벌주의가 재편될 뿐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서울대 정원을 축소하면 서울대의 위상이 줄어들까? 더욱 높아진 서울대의 문턱은 서울대의 위상을 한 층 더 끌어올릴 것이다.

 

지방은 식민지라고? 지방 소재 의대, POSTECH, KAIST, UNIST, 공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와 같은 학교들은 왜 이럴 때만 없는 취급하는지 궁금하다. 명문대생들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학벌주의의 폐단이 아니다.

 

대학에 가지 말아야 할 학생임에도 대졸이라는 학벌을 얻기 위해 4년의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는 것, 또 그들의 학벌주의에 기생하여 등록금만 납부하면 들어갈 수 있는 대학교가 너무 많다는 것이 진짜 폐단이다.

 

 

<협업 ⊂ 경쟁>

 

전 세계를 통틀어 유례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은 대한민국의 고속성장은 높은 성취 열망을 지닌 고급 인적자원들의 노력 없이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러한 역사 때문인지 우리나라는 우수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마그마급 교육열은 전세계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이는 어느 사회에서든 성공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수단이 교육이라는 증거다.

 

하지만 이상하게 당사자인 한국 사회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며 학력위조를 비롯한 온갖 범죄까지 학벌주의의 폐단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러다가는 한국의 모든 문제가 명문대와 명문대 졸업생들의 잘못이라고 탓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경쟁이 아닌 협업을 장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이 세상에 온전한 의미의 협업 따위는 없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협업은 결국 효과적인 경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같은 반 친구들끼리의 경쟁은 나쁜 경쟁이고, 다른 학교와의 경쟁은 착한 경쟁이라 말하는 그 무지몽매함은 우습다 못해 애처롭다.

 

협업을 통한 경쟁이 있을 뿐, 경쟁 없는 협업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동일 노력, 동일 성취>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을 외치는 사람들은 왜 동일 노력, 동일 성취는 외치지 않는 것일까? 본인 보다 앞에서 시작하는 이들을 향한 비난은 존재하되, 왜 저들이 나보다 앞에서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재수강이나 겨우 면해가며 어영부영 학교생활을 하는 사람이더라.

 

현대판 신분제도, 명문대생들의 사회 요직 집중화 현상, 진학 경쟁 심화와 낙오자 양산 등이 학벌주의의 문제로 꼽히지만, 명문대라서 뽑는 것이 아니라 뽑아 놓고 보니 명문대라는 인사 담당자들의 말이 더 일리 있어 보인다.

 

한편으로는 반대 사례로서 학벌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룬 이들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나는 학벌을 신분으로 보지 않는다. 그만큼 학벌만 좋은 낙오자들도 숱하게 많이 봐왔다. 물론 변명이 습관이 된 이들은 납득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나보다 높게 평가되는 모든 기준을 거부하지만, 정작 자신이 남보다 앞선 부분은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명문대에 가지 못했어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분노는 없다. 그들이 그곳에 이르기까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갈음하는 무언가를 나도 똑같이 투자했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딱히 후회도 없다. 내 인생에는 그들이 겪지 못했던 재미와 경험들이 많았으니까.

 

지금 내 앞에 서있는 사람들과 싸워서 이기려면, 적어도 그들이 행한 노력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노력은 ‘카르페디엠’을 외치고 다니던 과거의 내가 졌던 채무이자, 학벌이 내리는 벌(罰)이라고 생각하련다. 벌 좀 선다고 해서 큰일이 나지도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