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폐하라

인문학의 위기?

 

2014년 기준, 전국 대학생 중 인문계열 취업률은 45.5%, 전체 평균은 54.8%이다. 취업자 중 전공 불일치 비율은 인문계열 44.9%, 사회계열 30.5%, 공학계열 23.4%이다. 공학계열의 거의 두배에 달하는 인문계열 졸업자들이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일자리를 갖는 것이다. 이는 인문학교육이 초고도자본주의체제인 현대사회의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누구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표현을 한 번 쯤 들어봤을 것이다. 인문학이 위기라. 위기는 ‘위험한 시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위기’는 다시 말해, ‘문사철이 위험한 시기’인게 아닐까. 문사철이 위험한 시기라. 이 표현에서 출발하는 나의 빈한한 상상력은 다음과 같다. 문사철 출신들이 취업이 어렵다. 그래서 문사철 전공을 택하는 학생이 없어진다. 그 때문에 교수님들 월급주기 어렵다 정도?

 

이번에는 위기라는 단어를 넣은 다른 표현들을 생각해보자. 이공계의 위기. 공학의 위기, 경영학의 위기, 국가경제의 위기, 제조업의 위기. 대개의 ‘위기’들은 함께 짝지어지는 단어의 전망이 안 좋거나, 해당 산업지형에 인력이나 투자가 부족한 상황을 얘기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문사철’의 전망이 좋았던 적이 있던가? 애초에 ‘문사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산업지형이라는게 존재하긴 하는가? 80년대에 문사철 전공했던 어른들도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야 그때도 문사철은 취업이 어려웠어.’

 

졸업할 때가 되어 알았지만, 문사철은 철저하게 학계의 권위로 움직이는 곳이다.(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문사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본 텍스트다. ‘석학’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스타가 훗날 ‘고전’이라 불릴만한 무언가를 새로이 내놓지 않는 한, 대부분의 연구는 ‘2차 텍스트’에 해당한다. 실제로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 나아가 전공자 또한 본인들이 아는 ‘인문학자’의 이름을 당장 열명, 기껏해야 스무 명 이상 대기 어려울 것이다. 열명이라도 되면 다행이다. 최신의 ‘인문학자’라고 해봤자 겨우 지젝이 아니던가.

 

게다가 문사철은 현대사회에서 ‘데이터’가 중심이 되지 않는 거의 유일한 ‘학문’이다. 그래서 ‘쓸모’가 없다. 여기서의 ‘쓸모’란 산업과 노동을 위한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인문학은 원래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론은 동시에, 인문학이 근대 이후의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기초적’일 수는 있어도, ‘핵심적’인 무엇은 아님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은 노동과 소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인문학이 ‘흥하는’ 분야도 있다. 대표적으로 출판과 강연시장이다. 사학, 철학, 사회학, 정치외교학 4전공을 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젝의 저서가 베스트셀러 10위권에 오르내리고, ‘교양인문학’이라는 분야의 서적이 주기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대중인문학자’라는 사람들이 1년에 몇십억을 벌어들인다. 심지어 대기업은 임원들을 모아놓고 ‘인문학 연수’를 진행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인문학’은 대체 무엇이고, 왜 위기라고 불리며, 동시에 흥하는 시장이 발생하는 이유는 또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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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어디에서 왔고, 어떻게 변화했는가

 

흔히 인문학을 문사철로 부르긴 하지만, 인문학은 원래부터 문사철이었을까? 인문학의 본모습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Liberal Arts 혹은 Humanitas라는 개념이 어디서 왔는 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Liberal Arts의 어원은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한 기술(학문)’이라는 뜻으로,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정립된 개념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인문학(Liberal Arts)는 철저하게 ‘시민의 교양지식’이었다. 문사철이 중심이었던 것도 아니고, 당시로서는 실용지식에 해당하는 웅변, 수사학, 문법 등도 포함되었다. 보에티우스가 6세기경 ‘4학(수학, 음악, 기하학, 천문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전까지는, 너무 다양한 학문을 인문학이라 불러서 실질적인 구분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로마의 ‘시민’은 보편민주주의가 정착되기 이전의 개념이라, 실질적으로 노예를 소유한 ‘지주들을 위한 지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로마의 ‘시민교양지식’은 중세로 오면서 문법, 수사학, 논리학이 합쳐져서 7학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의 시민교양지식’은 ‘(평등한)인간 중심’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세는 철저하게 ‘귀족 중심’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대의 시민교양지식은 점차 제왕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쉽게 말해 중세의 인문학은 귀족을 위한 ‘사적인’ 교양지식이 되었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성직자 교육과정 안에 녹아들기도 하였다.

 

문사철 중심인 지금의 인문학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인 ‘인본주의(평등)’가 스며든 것은, 근대의 일이다. 보편민주주의라는 시대의 새로운 개념이 교양지식에도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결과적으로, 근대를 통해 인문학은 드디어 ‘보편시민교육’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Liberal arts(자유인의 학문)에서 Humanities(인간학)으로 변모하게 된 시기도 근대이다. 근대국가의 정립으로 공교육 중심의 보편교육은 ‘귀족교육’대신 ‘시민교육’을 제공하게 되었고, 그 중심에 문사철 중심의 인문학이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의 보편교육으로 기능하는 것은 대부분 1900년대 부터의 일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인문학(그리스의 시민교육과, 중세의 귀족교육)은 근대에 의해 재편되었다. 근대를 이끌어 낸 이성 중심의 사고체계들은 과거의 교육들을 편집하고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로 전근대의 흔적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신 중심 인간학’을 주장했던 학자들의 자취는 줄어들었고, 근대를 이끌어낸 ‘이성 중심 사고’가 부각되었다. 동시에 과거에 인문학으로 분류되었던 자연과학은 독립적인 학문이 되었고, 신생학문인 사회과학이 탄생했다.

 

동양의 경우에는 대대로 사농공사의 사(士), 즉 선비계급이 인문학적 지식을 독점했다. 농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실용지식을 제외하곤 농/공/상 계급에게 지금같은 교육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인문학도 근대의 흐름과 함께 발생하였다. 문사철은 일제시대에는 일본유학을 다녀온 근대지식인 중심으로 공유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사철을 보편교육으로 만든 것이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찍이 ‘자유교양협회’를 만들고, 전국의 초중고교생을 대상으로 서구 고전 중심의 ‘자유교양대회’를 8년이나(1968~1975)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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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학의 인문학

 

그렇다면 현재의 ‘대한민국 인문학’은 과연 ‘근대시민 보편교양’으로 작용하고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서 ‘보편교양’보다는 ‘근대시민’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는 ‘서울 명문 사립대’라 불리는 곳에서 국어국문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다. 4학년이 되어 이제 국어국문학은 실질적으로 끝났고, 사회학만 조금 남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나는, 혹은 우리학교 인문학 전공자들은 과연 ‘근대시민’이 가져야 할 ‘보편교양’을 얼마나 습득하고 있을까? 물론 훌륭한 시민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근대’라는 개념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서강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장실에 가면 변기 앞에 붙어있는 스티커로 알 수 있지만, 서강대는 인문학 중심 교육을 한다고 자랑스레 광고까지 하는 학교이다. 대한민국의 수험생은 학업성취도로 대학을 진학하고 있으니, 서강대보다 ‘대학 서열’이 높아도 큰 차이가 없거나, 최소한 낮을수록 더 할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어느 대학을 가서 문사철 전공자를 붙잡고 물어보아도, 근대/근대성/근대적 사고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중 하나만 되어도 대단히 많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고등학교 수능 공부와 대학의 교양 및 전공에서 ‘근대’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가 무엇이고, 근대를 이끈 사건들이 무엇이며, 근대의 핵심적인 사고가 무엇이라고 제대로 배운 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총체적인 근대성 개념을 알게 된 것은, 독학 덕분이었다. 나는 운이 좋았던 덕에 군대에서 상당히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전역할 때가 되니 ‘근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머지 이할은 사회학 복수전공 덕이었다. 국어국문학과 기타 인문교양의 좁은 세계에 갇혀있던 나에게, 사회학 복수전공은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정량적 접근법의 중요성을 사회학을 통해 알았고, ‘인문사회학’이 근대를 중심으로 편성된 지식체계임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시민과 시민사회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되었다.

 

사회과학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이 사실 인문학의 세계에서도 통용되었지만, 인문학을 전공하는 대부분의 친구들은 사회과학적 접근 방법에 대해 ‘비인간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이런 ‘반과학적’사고에 나름의 근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이러한 사고가 그들의 지적 게으름과 우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확증편향, 그리고 도그마가 결합한 결과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도그마의 총체는 국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수들은 나의 근대 중심 사고와 그 결과물인 리포트에 대해서 후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교수들은 근대는 물론이고 후근대적 에센스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반면 학생들은 근대적 사고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후근대적 에센스를 전근대-근대-후근대라는 맥락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저 독립적인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수들에게도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중심적’ 사고체계를 ‘근대시민적’ 사고체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책임은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대에 대한 자각만 있어도 어느 정도 ‘실용적인’ 학부 졸업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인문학의 ‘반실용성’은 학생과 현 교육시스템에 대한 무관심이 조장하는 부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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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학, 새롭게 변해야 할 때

 

그러므로 현재의 인문학은 현대에 맞는 인문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인문학을 통해 현대산업지형에 적응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현재의 인문학이 ‘쓸모 있는’ 분야는 교수의 밥그릇 뿐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인문학은 원래 산업지형을 위한 교육을 담보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대학’에서 전체 인문계 학생중 30% 이상이 문사철을 배우는 걸까? 문사철 학생들은 노동할 필요가 없는 특권계급이라도 되나?

 

현재의 인문학은 하루빨리 ‘근대시민교육’에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현대산업 지형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변해야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과학도 대거 포함되어야 한다. 현대 산업지형은 이미 인문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도 ‘무용’하다 판단하는 추세이다. 알고리즘과 로봇노동기술이 발전하고 각 산업분야에 적용될수록 사회과학의 강점인 ‘정량적 사고’에서 출발하는 ‘숫자 기반 실용성’ 또한 급격하게 추락할 것이 자명하다.

 

우선 현재의 인문사회학 교육은 데이터적 사고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인문학을 배우는 사람들이 데이터를 근거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고, 데이터를 놓고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과학(자연과학+사회과학)과의 융합이 당연히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지금처럼 데이터 중심의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에 ‘밀리는’ 인문학이 아니라, 데이터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과학은 유용하고 인문학은 무용하다’는 명제를 넘어서, ‘과학이 유용하다면 어느 분야에, 어떻게 유용하며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문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문사회학을 위해서는 중등교육과정에서 배우는 인문사회학을 압축된 근대 시민 교육 에센스로 구성해야한다. 이미 수능과 논술은 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등교육 지식체계를 선행하는 구조로 굳어졌다. 그리고 고교교육 내의 인문사회학 분과(국어, 탐구, 논술)는 이미 컨텐츠적인 부분에서 상당부분 ‘근대’를 중심으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인지하는 공교육/사교육 종사자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역사분과, 그 중에서도 특히 세계사를 제외하고는 근대라는 개념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컨텐츠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중등교육 과정을 논하면서 사교육까지 포함하는 이유는, 인문학의 긴 역사 중 가정교육과 사교육이 차지하는 지분이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재의 인문학을 옹호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논리인 ‘인성교육’이나 ‘전인교육’ 등은, 사실 국가에 부속된 교육기관이 아니라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근대의 개념이 없는 현재의 부모세대가 자녀에게 근대적 시민교육을 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재의 사교육은 공교육과 실질적으로 같은, 혹은 더 나은 기능을 수행한다. 인강을 비롯한 다양한 플랫폼을 덕분이다. 그러므로 우선 중등교육과정에서 ‘근대시민교육 혁명’이 가장 급하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중등교육과정에서 후근대 혹은 현대의 기본적인 에센스까지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니체가 어떻게 말했고, 플라톤의 이데아가 뭐고 이런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량적 사고, 실증적 사고, 이성적 사고 위에 후근대성까지 인지하는 인간형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또한 고등교육 과정인 대학과 대학원은 인문학 전공자의 수를 대폭 축소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극소수의 연구자(상위 2% 내외), 소수의 교육자(상위 10%내외)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인문학을 기초교양으로 수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인문사회학은 근대적, 후근대적 사고를 중심으로 재편된 필수교양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산업지형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기술교육이 이원체제로 수반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연구자와 교육자의 분리 또한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인문사회학이 모든 학부의 필수교양이 된다면, 인문사회학 연구자와 교육자 수요는 유지될 것이다. 그러므로 극소수의 연구자를 길러내는 특수대학 혹은 특수대학원 과정이 신설되어야 한다. 교육부에서는 학파와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국립대에 인문학부를 남기고, 사립대끼리 유치경쟁을 해야한다. 마치 로스쿨이나 의대처럼 말이다. 물론 인문학은 법이나 의학과 달리 유치경쟁이 일어나긴 어렵겠지만, 유치에 성공할 시 다양한 혜택을 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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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이며,

 

근대의 위계가 서구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이미 100년 전의 개화기 지식인들도 고민하던 사실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물질적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내면서, 이미 근대 위계의 정점 근처로 꽤나 올라온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세계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글로벌 인재를 길러야 한다. 뭐 이런 얘기들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시민’을 넘어 후근대 사회에 적합한 ‘세계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우선 근대시민 멘탈리티부터 교육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해서 이야기하자면, 미국소재 명문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외국인 친구들은 이미 근대를 이해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개인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해외 명문대 출신인 외국인 친구들은 내게 ‘근대는 일방향적 사고라서 문제가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근대적 사고의 문제점을 모르는 것이 전혀 아니었지만, 묘하게 씁쓸한 기분 때문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반면 국내에서 근대에 대해 얘기해봤자 돌아오는건 ‘이게 무슨 듣도보도 못한 소리?’ 같은 반응밖에 없었다. 경제규모야 서구권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 되었지만, ‘시민교양’ 교육은 아직도 ‘근대지향사회’와 ‘후근대사회’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를 좁힐 ‘인문학’의 재탄생. 탈진영 세대가 안된다면, 그 다음 세대라도 필요한 일이다.

 

원글 : http://www.disslike.net/archives/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