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님이 허락하신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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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의 저자인 문유석 판사(페이스북)의 칼럼이 중앙일보에 올라왔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인터넷에 분노한 남성들이 많다.
2. 하지만 여성들의 분노가 더욱 크고 정당하다.
3. 남성들이 너무 둔감한 게 아니냐.
4. 좀 더 큰 그림을 ‘돌아보라’

해당 칼럼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중앙일보의 댓글란에 달린 글의 논지를 비판하는 댓글들에는 압도적인 ‘비추천’이 달렸다.

문유석 판사는 글에서 ‘남성들’이라고 뭉뚱그려 놓았지만, 실제로 ‘역차별’을 체감하는 남성 중 절대다수는 ‘젊은 남성’이다. 그리고 ‘나이든 남성’과 ‘젊은 남성’을 분리하는 시각에서 문유석 판사의 글을 보면,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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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 1

“여성들은 능력에 맞는 기회와 임금을 달라, 출산과 육아를 이유로 직업상 불이익을 주지 말라, 때리지 말라, 용변 보는 걸 몰카로 찍지 말라, 강간하지 말라, 죽이지 말라며 분노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여자는 군대 안 가냐, 더치 페이 왜 안 하냐, 왜 농담에 예민하게 구느냐, 난 안 그러는데 왜 싸잡아 욕하느냐로 분노하고 있다. 이거야말로 누군가 말했던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는’ 예가 아닐까.”

문유석 판사의 한마디.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문맥을 감안한다면, 해일은 여성들이 받고 있는 ‘중대한 차별’이고 조개는 남성들이 받는 ‘사소한 역차별’이 된다. 이제부터 문유석 판사가 꼽은 해일과 조개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한다.

우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법조계에 대한 얘기를 했다. 여성 부장 판사가 언제 탄생했고, 전체 법관 중 여성은 ‘아직’ 28%에 불과하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직’이다.

문유석 판사는 ‘분노한 남성’들로 뭉뚱그려서 표현했지만, 역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남자들은 보통 ‘젊은 남자’다. 여기서 현재 로스쿨 합격생의 남녀 비율을 보도록 하자. 2014년 기준으로 남성은 56.3%, 여성은 43.7%이다.

아직 12%나 차이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로스쿨 정원에서 대표적인 남초과인 법학/상경/공학 비율이 과반을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그리고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이화여대 로스쿨을 생각하면 불평등이 ‘실제로는’ 거의 없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설령 모종의 차별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젊은 남성들의 책임은 아니다. 젊은 남성이 뽑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유석 판사가 말했듯 법관 중 여성 비율은 ‘아직’ 28%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이미 나이든 남자들이 법조계에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여성법관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들어왔던 수많은 ‘나이든 남성’들은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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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법시험 합격자의 평균연령 상승(김두얼, 2010)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 2

아래는 문유석 판사의 글에 나오는 부분이다. 여기서도 문유석 판사의 자기모순을 발견할 수 있다.

“역차별을 호소하는 남성들은 군대, 데이트 비용, 결혼 비용을 이야기한다. 맞다. 차별이다. 그런데 그 차별조차 여성들이 만든 게 아니다.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에 스스로 만든 차별이고, 시대 변화에 따라 자연 소멸할 운명이다.”

문유석 판사는 차별을 만든 이들이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의 남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문유석 판사는 ‘사회적 역할을 남성이 독점하던 시대의 남성’이다.

20년 전에 태어난 남성과 지금 태어난 남성 중 누가 경쟁상대가 적은가를 묻는다면, 대답은 당연히 전자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 시절에는 남자만 경쟁하면 됐다.

문유석 판사가 법조계를 예로 들었으니, 법조계 예를 하나만 더 들겠다. 사법시험 여성합격자 비율을 보자. 사법시험 여성합격자 비율은 2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겨우 20%를 넘긴다. 그 전에는 처참한 수준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가파르게 상승하더니, 2000년대 후반부터는 40% 언저리의 비율을 보여준다.

이번에는 대학진학률이다. 1990년의 여성 대학진학률은 31.9%였다. 그러나 현재의 여성 대학진학률은 74.6%로, 남성의 67.2%보다 7.4% 더 높다. 20대 고용률 자체도 여성이 더 높다. 20~24세 고용률은 꾸준히 여성이 남성보다 50% 이상 높았으며, 25~29세 고용률은 2000년대 중반부터 10%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래는 경향신문의 특집기사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1990년대의 신입사원은 2016년의 청년세대와 불화한다. 1990년 무렵 사회생활을 시작한 40·50대들은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중산층까지 올라설 수 있었다. 그들은 “힘들면 눈을 낮추고, 경력부터 쌓으라”고 말한다. 지금의 청년들은 눈을 낮추고 차곡차곡 인턴과 스펙을 쌓아도, 때로 정규직 문턱에 들어서도, 경제적 걱정 없이 인생을 출발하기 힘들어졌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기성세대 남성들은, 경제 호황기에 여성과 경쟁하지 않고 사회의 주류로 안착한 사람들이다. 반면 지금의 젊은 남성들은 저성장시대의 문턱에서 넘어졌는데, 여성들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문유석 판사는 ‘해일’로 임금과 직업상 불이일을 꼽았지만, 여성들에게 임금이나 직업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젊은 남성들이 아니다. ‘고용주’는 보통 경제 호황기에 여성과 경쟁하지 않고 사회의 주류로 안착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때리거나 죽이거나 강간하거나 몰카찍는 것은, 엄연한 ‘범죄’이자 비정상의 영역이다. ‘몇 년간 몇 퍼센트 증가’ 같은 자극적인 수사를 달아도, 저런 일들은 통계적으로 ‘비일상’ 혹은 ‘비정상’에 해당한다.

군대, 결혼비용, 더치페이 같은 것들은 ‘사회적/경제적 생존’에 ‘일상적 위협’을 받는 젊은 남성들의 양성평등에 대한 요구이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은, 남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런 범죄자들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당연하게도 상당수의 젊은 남성들은 범죄자들과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한다. 그러니 어이가 없고 화도 나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 남성들의 억울함을 ‘사소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남녀간 ‘분노’사이에 경쟁구도가 성립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일진대, 웬 아저씨가 강남역 먹자골목의 조개구이집 알바생한테 ‘해일이 오고있는데 팔자좋게 조개나 까고 있냐’고 훈계하면 듣는 알바생은 당연히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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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판사님이 허락한 페미니즘

‘여성차별’이라는 거, 문유석 판사가 ‘만든’ 건 아닐거다. 그러나 문유석 판사는 ‘일찍 태어난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수혜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8~90년대 사회 풍조를 떠올려 본다면 차별의 벽을 유지하는데 알게모르게 ‘기여’를 했을지도 모른다.

문유석 판사는 ‘큰 그림을 보라’고 말하기 전에 거울부터, 아니 최소한 자기가 속한 세대부터 돌아봤어야 하는게 아닐까. ‘조개줍는’ 젊은 남성들에게 ‘세상의 절반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치기 전에 ‘해일을 만들어서 미안하다’라는 말부터 해야하는게 아니었을까. 결국 그 세상의 절반을 막고 있었던 것은, 문유석 판사와 같은 ‘나이든 남자들’이 아니던가.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라는 말, 최근에 많이 들어봤다. 여성들이 ‘페미니스트를 자청하는 남성’을 조롱거리로 삼을 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번 문유석 판사의 ‘판사님이 허락한 페미니즘’ 글은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페미니즘이라는게 결국 오빠는 안되는데, 판사님은 되는. 뭐 그런거였나 싶은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