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퍼트” 열풍과 글로벌 스탠더드

미안해요리퍼트 부채춤_노컷뉴스

ⓒ 노컷뉴스

 

지금 이 광적인 ‘미안해요 리퍼트’ 열풍(이제 부채춤, 난타에 이어 발레공연까지 등장했단다)은, 과연 정말로 미안해서일까, 아니면 그저 두렵기 때문이어서일까?

물론 두 가지 이유가  다 조금씩 섞여있겠지만, 그 주된 동력은 아마도 두려움일 것이다. 외국, 그것도 세계 최강대국, 거기다 하필이면 나라를 대표하는 높은 사람에게 미개한 짓을 저지르는 바람에 우리가 통째로 아프리카나 중동 저질국가 수준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는 게 너무나도 쪽팔려서, 뭘 좀 만회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저러고들 있는 것 같단 얘기다. 미개한 게 쪽팔리고, 이게 알려질까 두려운 것이다.

한마디로, 국제 신분질서(?)에 민감한 계급주의 근성이 강대국들 중심으로 짜여진 글로벌 스탠다드에 대한 압박으로 해석되다 보니 일어난 공포인 거다. 다만 미개한 사람들이 자신이 미개하다는 사실을 덮으려 할 땐 한층 더 미개해 보이는 일들을 벌이게 된다는 불문율이 작동하고 있을 뿐.

사실 이런 일, 처음도 아니다. 가까운 예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터키 준결승 시작 전, 태극기와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서 나란히 올라간 그 유명한 순간에도 이와 같은 맥락을 읽을 수 있다. 대외적으론 6.25 때 참전해준 우방국이라느니, 형제의 나라라느니 그럴싸했지만, 사실 당시로서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터키는 조예선 1차전 당시 브라질과 경기하게 됐는데, 한국심판이 터무니없는 PK선언을 하고, 히바우도의 오버액션에 레드카드까지 내미는 바람에 억울하게 패하게 됐다. 이상한 판정에 동요하고 있는 터키 관중들 앞에서 한국 관중들은 ‘당연히’ 인기 많은 브라질을 노골적으로 응원하며 터키에 야유해댔다. 이 모습을 보고 한국까지 찾아온 터키 축구팬들이 ‘형제국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이런 불만이 방송전파를 타자, 붉은 악마를 중심으로 난데없이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아 맞아 우리가 너무 미개하게 유명팀만 응원하고 솔직히 심판도 좀 미개하게 잘 나가는 팀 유리하게 해주고, 글로벌 호구 같이 굴었던 거 같아, 미안미안.” 별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붉은 악마는 터키팀을 의식하며 사과의 제스쳐를 보내기 시작한다. 터키팀의 다음 경기부터 사람들을 보내 터키를 응원하게 했다. 그러다 터키가 일본의 8강 진출을 막는 공헌(?)을 하자, 급기야 국기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2002월드컵터키전국기

<이미지 출처: 2002년 한일월드컵 터키전 방송 캡쳐>

 

즉 ‘미안해요 리퍼트’라며 나라가 떠들썩한 것은, 단순히 미국이 강대국이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우리의 미개함이 해외에 알려지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고, 그 두려움이 바로 이런 열풍의 동력이 되었다. 20세기 초반에 양반 족보 사들인 98.4%의 비양반 조선인들처럼, 이제 돈 좀 벌어 준귀족 행세하려는데 걸림돌이 되는 ‘미개의 증거’들을 모조리 불사르려 하는 것. 이와 비슷한 모습이다.

21세기에도 이런 식이었는데, 그 이전 시대의 ‘외국인에게 그럴싸하게 보이자’ 무드는 당연히 더 심했었다. 1980년대 민중시(?) 중에는, “해외에서 관광객이 찾아오면 남자들은 모두 하인이 되고 여자들은 모두 창녀가 된다. 모두들 웃는 얼굴로 상전 모시듯”이라며 이러한 모습을 꼬집은 대목이 있었다. 영어 한마디 못해 외국인이 길 물어봐도 줄행랑 쳐버리는 미개함(사실 교육의 문제였는데)을 비판하는 방송들도 많았다.

저 ‘미안해요 리퍼트’, 바꿔 말해 ‘미개해서 미안해’ 시리즈는 시대를 막론하고 존재해왔다. 또 그 계기만 만들어지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는 일이다. ‘미안해요 리퍼트’ 시리즈나 ‘두 유 노 강남스타일’ 놀리기나,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모두가 숨기고 싶어하는 이 일면을 대놓고 까발린 정몽주니어는 천기를 누설한 만고의 역적이 되었다.

한국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집착이 워낙 큰 나라다. 이러한 집착이 계급공포로까지 (거기다 여긴 계급공포의 왕국이다) 번지는 분위기다. 게다가 극단적 압축성장 탓에 불과 10년, 20년 세대차는 물론, 심지어 같은 세대 내에서까지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잘 적응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로 나눠져 있다. 이들 사이의 간극은 갈등으로 번질 수 밖에 없다. 단적으로 말해, ‘글로벌’에 적응한 이들이, 그렇지 못한 이들을 극단적으로 “쪽팔려하며” 배척하려는 구도가 대한민국의 정서로 심어졌고, 이러한 정서는 다양한 계기를 통해 표출된다는 말이다.

남 눈 의식하는 거에 미쳐있는 이 집단주의 병폐는 김기종 같은 반동적 인간도 낳았지만, 동시에 그거 미안하다고 발레까지 기획한 인간도 낳았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의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