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사태가 보여주는 팩트신봉의 함정


​▲ 2012 미 대선 당시 오바마와 롬니 양 후보가 제시한 엇갈린 “팩트”들은 이른바 팩트 전쟁을 불러왔다. <이미지 출처: Time>

인터넷의 유행어는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는 지표가 된다. 반론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인 양 취급되는 “팩트(fact)”라는 단어가 그렇다. 팩트는 무언가를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팩트는 어떤 주장이나 논리를 증명하는 구체적 근거가 된다. 실재하는 사실 그 자체인 팩트는 주장이나 의견으로 반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엔하위키 미러에 따르면 팩트는 2010년 즈음부터 누리꾼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단어다. 원래 언론계에서 사용하던 전문용어였으나 그 쓰임이 늘어난 것이다. 한국어로는 “사실”이라는 뜻에 해당하지만, 사실이 아닌 것이나 주관적인 내용을 사실이라고 왜곡하는 경우가 자꾸 늘다보니, 주관성을 배제한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진위를 판단하기 어려운 정보들이 넘쳐나는 인터넷의 고질적인 문제점이 팩트라는 단어를 널리 쓰이게 한 계기다. 진실에 대한 이용자들의 수요가 만들어 낸 유행어인 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팩트라는 단어가 이용자들의 바람을 배신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진실과 사실은 유사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저널리즘에서는 진실을 사실보다 큰 개념으로 정의한다. 진실은 여러 가지 사실들이 컨텍스트(맥락) 속에서 어우러진 큰 그림이다. 반면 팩트(사실)는 단편적인 개념이다. 진실의 한 조각에 불과한 이 팩트를 취급함에 있어 컨텍스트(맥락)를 고려하지 않으면 전체적인 진실은 왜곡될 수 있다. 이는 곧 팩트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충분히 악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의견을 주장함에 있어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인에게 유리한 사실적 정보 한 조각만 빼내서 이용할 경우 진실은 편파적으로 오도된다. 

퍼즐

▲ 팩트는 진실이라는 큰 그림을 이루는 퍼즐 한 조각과 같다. 퍼즐 한 조각만 떼내서 다른 그림의 일부처럼 보이게 만든다면, 전체 그림은 왜곡된다. <이미지 출처: shutterstock.com>

지난 6월,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를 놓고 벌어졌던 KBS 왜곡 보도 논란의 핵심에 바로 이 ‘팩트의 함정’이 있다. 6월 11일 청와대에서 문창극 교수를 총리로 지명하자, 같은 날 KBS 9시 뉴스는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검증보도라며 문 후보의 과거 교회 강연 영상을 편집한 리포트를 방송했다. 당시 KBS 언론노조는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의 나팔수라며 사퇴 시위를 하던 무렵이었으며, 청와대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KBS 홍성희 기자는 문 후보의 과거 온누리교회 강연 내용을 전체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 편집했고, 방송을 통해 문 후보가 친일 식민사관에 젖어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겨냈다.

문제 리포트는 “교회 장로인 문창극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의 식민 지배와 이어진 남북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라며 시작됐다. 이어서 문 후보의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아까 말했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는 발언을 잘라서 방송했다. 이 ‘팩트’만 놓고 보면, 시청자들이 문 후보를 친일주의자로 오해할 여지가 충분했다.

KBS 문창극

▲ 문창극 후보자의 역사관과 관련하여 논란을 일으켰던 KBS 9시 뉴스 리포트. 강연 앞 뒤 내용을 무시한 채, 오해를 살 만한 발언만 편집하여 방송했다. 한 조각 “팩트”가 편집자의 의도로 진실을 오도했다. <이미지 출처: KBS 9시 뉴스>

그러나 문 후보의 “아까 말했듯이“라 언급했던 부분을 찾아보면 이러한 오해가 완전히 풀린다. “돌이켜보면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저는 확인합니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기 위해 고난을 주신 겁니다. 우리 민족에게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매번 길을 열어주셨어요. 지금까지 오면서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기회가 되었고 그 기회가 되어가지고 나라가 왔습니다“라는 대목은 문 후보 강연의 핵심 대목이었다. 즉 문제 발언은, 일제의 식민지배는 우리의 고난이었으며,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을 단련하여 번영의 길로 나아가게끔 한 하나님의 뜻이니 우리는 이 과거의 아픔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더 나은 길로 나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KBS​의 주장대로 일제를 찬양하는 발언이 아니었다.

문 후보는 반일주의자다. 독립유공자의 가문에서 자라 애국을 위해 힘써왔던 사람이며, 일본의 작태를 비판해왔던 사람이다. 과거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 땅을 보고 일본대사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됐는가. 정작 당당하게 나가야 할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 눈치를 보며 쭈뼛쭈뼛 어물거렸기 때문이다“라며 일본의 역사왜곡과 독도 영유권 주장 행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노무현 정권을 강력히 비판할 정도로 그는 일본에 있어 단호한 입장을 취해왔다. 나아가, 더 이상 일제 시대의 아픈 역사가 한민족을 괴롭히지 않도록 이를 극복하자고 외치는 극일(克日)주의자기도 하다.

문창극 독도사랑

​▲ 문창극 전 후보자는 열정적인 극일(克日)주의자이자 반일주의자로, 특히 독도 문제와 관련하여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미지 출처: 일요시사>

문창극 애국

▲ 논란 당시 문창극 전 후보자의 조부가 독립유공자로 밝혀졌음에도, 수많은 진보 여론은 이를 외면했다. <이미지 출처: 조선닷컴>

그러나 KBS의 보도는 이러한 팩트들과 강연의 컨텍스트를 생략하고 본인들의 의도에 맞는 단편적인 팩트만 방송함으로써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를 일제의 앞잡이인 양 묘사했다. 해당 보도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문 후보의 강연 영상 전체를 찾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KBS가 내놓은 단편적인 팩트에 의해 문창극 전 후보자의 역사관을 오해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KBS의 왜곡 보도와 관련하여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9조(공정성) 1항과 2항, 14조(객관성) 위반을 적용해 행정 지도인 ‘권고’를 결정했다.

미디어의현실

KBS의 문창극 리포트는 당시 방송을 장악하고 있던 진보 성향의 KBS 노조가 문 후보를 공격하고자 하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방송한 것이었다. 서구 주류 매체를 비판하는 이 그림은 문창극 사태를 요약한다. <이미지 출처: wikipedia.org>

문창극 후보 낙마 사례가 보여주듯, 팩트에는 함정이 있다. 컨텍스트를 무시한 채 언급되는 팩트는 진실을 왜곡한다. 이 경우 팩트는 진실이 아니라 기만에 가깝다. 이 세상에 완전 무결한 가치중립적 팩트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팩트라는 단어만 붙으면 반박해서는 안 되는 성역이 생겨난다. 팩트의 불완전성에 주의하지 않으면, 결국 진실을 추구하는 우리의 바람은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상대방의 의도에 의해 놀아나게 된다.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는 기자회견에서 후보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며 진실과 사실의 차이를 강조했다. 팩트의 함정에 의해 희생된 그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세지다.

“언론의 생명은 진실 보도입니다. ‘진실’ 보도입니다. 발언 몇 구절을 따내서 그것만 보도하면 그것은 문자적인 ‘사실’ 보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체 의미를 왜곡하고 훼손시킨다면 그것은 진실보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리즘의 기본은 사실보도가 아니라 진실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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