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한국형 진보는 실패하는가?

“먹고사니즘”이 한국에서는 유독 새누리 지지자들이나 시장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처럼 되어있는 상황은 문제가 있다. 사실, 큰 정부, 복지노선이 유럽 선진국에서 이 정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먹고사니즘에 충실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의 재분배를 통해 소위 말하는 계급 간 격차를 줄이자는 복지노선의 사회적 모델은 먹고사니즘의 관점으로 봤을 때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상류층, 중산층은 잘 먹고 살고 있으니, 하위층에도 적당히 먹고 살 수 있는 영역을 나눠주자는 거 아닌가.

사실 친새민련 진영이나, 좌익 진영 사람들 사이에서 먹고사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과거 독재시절에 “먹고 사는 일에 충실한다”는 것은 곧 불의에 침묵하고 체제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믿음이 실제로도 꼭 맞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만, 그 검증은 여기서 논외로 하겠다.) 그래서 운동권은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자신의 사적인 욕망(소소한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까지도)을 포기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곤 했다.

박원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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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인이나 사업가, 가정주부가 된 이들의 실제 생활과 공적 표현에 괴리가 생긴다.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먹고사니즘 없이는 가정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없는데도, 공적인 입장을 표할 때만큼은 철저히 아닌 척을 해야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혹은 외부적 압력은 특히 반 새누리 진영 중 중산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사람이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이들은 언제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새누리당에게 투표하는 노동계급의 ‘탐욕’을 비난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갖는 욕망은 가려버리거나, 그 의미를 최대한 축소시키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왜 욕망이 없겠는가. 더 넓고 비싼 아파트,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위한 사교육, 자동차, 해외여행, 각종 문화생활과 단란한 가족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한 피크닉 등. 그들은 소위 대한민국 주류세력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그 주류세력의 일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혹은 애써 부정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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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은 이렇게 항변할 수 있다: “우린 이명박 만큼 탐욕스럽지는 않다”. 뭐, 그 말 자체는 맞는 말 일수도 있겠는데, 문제는 그들의 중산계급적 욕망은 이미 빈민계급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이 상당한 거리감을 느낄 만큼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민”이라는 단어를 끌어와 마치 권력처럼 휘두르면서 사회의 ‘갑’들에 대한 피해의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정도가 심해지면 누가 더 못사는지를 자랑하는 컨테스트가 되기도 한다.) 먹고사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정작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있으면서 말이다. 단지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없게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이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욕망. 먹고사니즘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이 것을 부정하려 해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돼버리면 자가당착에 빠져버린다. 애당초 정치적 논의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다. 저세금, 저복지, 자유시장 노선이나, 고세금, 고복지, 복지노선이나 양쪽 모두 다 잘 먹고 잘 살자는 욕망이 전제되어 있다.

강일구 일러스트

ⓒ 강일구 (일러스트)

 

‘먹고사니즘’은 결국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며, 이것은 곧 바른 정치참여에의 원동력이 된다. 무엇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생각에는 개인차가 있다. 그 차이에 의해 정치노선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의 유무로 좌우를 가르고, 우측 진영은 마치 지고지순한 자신들과는 다른 욕망덩어리인 것처럼 말하는 현 분위기는 쓴웃음을 짓게한다.